일본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최고의 우키요에 작가 호쿠사이(葛飾北斎)는 장수했다. 90세가 되어 기력도 쇠하고 죽음이 목전에 왔음을 느낀 호쿠사이는 “몇 년만 더 시간이 있다면 그림이 무엇인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텐데”하며 안타까워했단다. 도쿄에서 호쿠사이전을 관람하며 안내책자에서 읽게 된 이 말은 나에게는 조금 생소했다.
나라면 “나에게 조금만 더 시간이 남아 있다면 혼신의 힘을 다해 정말 멋진 작품을 하나 남길 수 있을 것 같은데”와 같은 소망을 말했을 것 같다. 아니 대부분의 화가들이 그런 소망을 갖지 않을까 싶다. 이 두 소망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호쿠사이는 작품이 아닌 작품의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원리 추구를 이야기하고 있고 나의 소망은 원리야 어찌 되었든 그간의 경험을 쏟아부어 걸작을 남기고 싶다는 소망을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호쿠사이는 예술가이지만 원리를 추구하는 과학자의 태도도 동시에 갖고 있었다. 그가 남긴 연습장에는 인체나 동물의 다양한 동작, 골격 등을 연구한 흔적이 가득하다. 마치 화가이자 공학자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를 보는 듯하다. 그가 남긴 걸작 후가쿠 100경의 <바다와 하나되어>를 보면 그의 이 같은 태도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부서지는 파도를 아름답게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일정한 규칙에 따라 그렸다.
예컨대 파도의 전체적인 형태는 황금와형(황금비에 따라 장방형을 분할해 만드는 소용돌이 형상)을 이루고 있고 포말들은 프랙탈적 특징을 가진 모습으로 전개된다. 황금비는 매우 오래 전 중국과 한국에 전해졌지만 그리 중시되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에는 황금비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높았던 것 같고 그 흔적이 교토 금각사, 홋카이도 고가쿠지 등에 선명하다. 호쿠사이의 그림도 그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프랙탈은 현대물리학 용어인데 자연계에서 자주 나타나는, 동일한 형상이 크기를 달리하면 반복적으로 나타나 복잡한 형상을 만들어내는 현상을 일컫는다. 호쿠사이가 프랙탈을 알고 있었을 리는 없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집요한 관찰을 통해 먼 훗날 프랙탈의 그림자쯤이라고 여겨질 만한 한조각 원리를 움켜쥐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갑자기 호쿠사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일본 문화 속의 강한 규칙지향성을 말하기 위해서다. 규칙지향성은 통제감을 얻기 위한 중요한 방편의 하나다. 호쿠사이의 경우는 자신이 그리는 모든 그림의 아름다움을 높이기 위해 미의 원리를 파악하려 진력했던 것 같다. 원리를 알고 그 원리에 따라 그림을 그린다면, 그는 언제나 아름다움을 통제하는 셈이 된다.
규칙지향성은 일본 문화 저변에 깔려 있는 중요한 특징이다. 예컨대 기노쿠니야(일본의 대형 서점)에 가면 언제나 미술, 디자인, 음악의 미적 효과를 관리하거나 원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려는 서적 몇 권은 쉽게 찾을 수 있는데 그 동안 필자가 사 모은 서적만 60여 종이 넘는다. 미국에서 발간되는 책들도 거의 갖고 있지만 일본에 비할 바 못된다. 서적의 경우 유럽과 미국이 거의 통합된 시장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일본의 미적 원리에 대한 관심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강하다.
서구를 포함한 대부분의 문화권에서는 예술은 영감과 창의력이 지배하며 사람마다 기준이 다른 상대성의 세계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자유로운 상상력과 풍부한 감성 그리고 필요한 기법 연마가 예술창작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미적 원리를 찾으려는 탐구는 다소 무망한 것으로 보려는 시각이 최근까지 지배적이었다.
물론 미적 원리를 심리학이나 뇌과학에 토대를 두고 연구하는 서구의 학자들이 점차 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대세는 아니다. 그런데 일본에는 이런 연구자들이 세계 어느 곳보다 많아 보이는데 기본적으로 일본 문화저변에 호쿠사이와 같은, 규칙 지향성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술뿐 아니라 사회의 모든 영역에 해당된다. 예컨대 일본 스포츠하면 일단 무슨 종목이건 정교한 기술과 매우 전략적인 플레이가 특징이다. 이런 태도는 어느 정도 위력을 발휘해 피지컬에서 열세일 수밖에 없는 일본인들이 세계최고 수준의 성적을 내는 스포츠 종목이 적지 않다.
매뉴얼 사회라는 세간의 평가도 이와 무관치 않다. 어떤 상황이건 원리를 이해하면 통제하고 예측할 수 있다는 믿음이 만들어낸 것이 매뉴얼이다. 물론 이런 풍조가 사회와 개인을 경직되게 만드는 단점도 있다.
규칙지향성은 규칙이나 원리에 관심이 많고, 한번 만들어진 규칙과 원리를 지키려는 강한 성향을 말한다. 일본의 규칙지향성은 두 개의 뿌리를 갖고 있는데 하나는 규범(Norm)지향성이고 다른 하나는 지난 두 번에 걸쳐 다루었던 통제욕이다.
통제욕과 규칙지향성의 관계는 호쿠사이의 사례에서 짚어 보았으니 여기서는 규범지향성만 이야기하자. 일본처럼 4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외부와 단절되어 있는 나라들은 대개 정치, 사회, 경제, 예술 등 전 분야에 걸쳐 규범이 쉽게 형성되고 이 규범을 지키라는 강력한 압력이 사회에 존재한다. 다른 나라와 왕래가 많은 지역의 사람들은 다른 규범을 가진 사람들을 자주 만나며 자연스레 자신들의 규범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데 고립된 지역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고 고립된 지역이 마냥 고립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 항상 그대로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변화와 다른 지역과의 교류 때문에 기성의 규범은 변화의 압력을 받게 된다. 규범은 변할 수 밖에 없다. 규범지향성이 강한 문화는 규범을 지키기 위한 상당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변화가 더디게 일어난다.
규범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성의 것을 지키려는 ‘묻지마식 보수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성의 규범을 뒷받침하는 정교한 논리와 근거를 개발하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니 규범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규칙이나 원리를 파악하려는 나름의 노력을 기울일 수 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규범지향성은 규칙지향성과 동전의 앞뒷면 같은 관계다. 규칙지향성이라는 말에 규범지향성까지 함의된 것으로 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규칙지향성이 만든 일본 문화의 특징 하나가 심화형 문화다. 한 문제에 깊숙이 파고들어 해법을 찾아내고야 마는 심화형 문화는 일본의 저력을 만드는 커다란 장점이다. 반면 19세기 메이지유신을 이뤄냈지만 최근 들어 변화가 더디다는 평을 듣는 것도 규칙지향성에 수반되는, 보수성이 만든 특징이다. 그리고 규칙지향성의 심연에는 일본의 자연환경이 만든 통제감에 대한 욕구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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