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번 작성한 유후인 쇼와칸을 다룬 기사에서 아키히토 상왕 부부의 결혼식 사진에 대해 짧게 언급했는데, 이번 기사에서는 <천황제와 젠더>(작가: 가노 미키요)라는 책을 참고하여 일본 왕실 최초의 평민 출신 황태자비, 미치코 상왕후의 “밋치 붐”에 대한 기사를 작성해 보고자 한다.
미치코 상왕후는 1934년 10월 20일 닛신제분의 사장 쇼다 히데사부로의 장녀로 탄생하였다(현 나루히토 일왕의 어머니). 닛신제분은 현재도 일본에서 유명한 대기업 컵라면 회사다.

미치코 상왕후는 어린 시절에 집에 난로며 피아노도 있고 유럽 여행도 다녀왔다고 하니 상당한 부유층이었고, 세이신여자대학교(도쿄 소재) 영어영문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해 졸업식 낭독, 학생 회장까지 역임한 수재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1957년 가루이자와 테니스장에서 아키히토 왕태자를 처음으로 만나 연애를 하게 되었고 전화 데이트 중 미치코 상왕후는 청혼을 받게았지만 일본 왕실 내에서의 반대가 심했다. 특히 아키히토 왕세자의 어머니인 나가코 왕비(쇼와 일왕의 아내)의 반대가 극심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미치코가 “평민”이라는 이유였다. 그 전의 왕후들은 왕족이었는데 평민이 왕태자비가 된다고 하니 당시 왕실에서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쇼와 일왕은 “왕실에도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라며 며느리로 허락하였다.

일본 전국에서는 경사가 났다. 앞서 서술한 대로 가루이자와 테니스장의 첫 만남을 소재로 히나마쓰리(3월 3일 여자아이의 건강한 성장을 기원하는 날)에 테니스복을 입은 “밋치 인형”을 판매하였고, 은행에서는 왕태자 성혼 기념 정기 예금이 생겼다고 한다. 심지어 당시 도쿄 소재 고등학교에 다녔던 사람의 인터뷰에 따르면 왕태자의 결혼은 역사적인 일이니 결혼을 시청하고 소감을 숙제로 내주었을 정도라고 한다.
1년 전인 1958년, 일본 전국에 100만 대 보급되었던 텔레비전은 이 결혼을 생중계로 보기 위해 200만 대를 돌파했고 심지어 텔레비전 품절 사태까지 일어났다고 한다. 아키히토 왕세자 부부는 1959년 4월 10일에 결혼식을 거행한 날 회사와 관청, 학교는 휴일이었다고 하니, 일본 국민들에게 얼마나 큰 행사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일 날에는 텔레비전이 설치된 전자상가, 식당, 대중목욕탕에 모여 약 1,500만명에 이르는 일본 국민들이 이 결혼을 생중계로 시청하였다. 이 날 이후로 미치코는 일본 왕실 최초의 평민 왕세자비가 되었으며, 당시 야마구치 중학생의 인터뷰에 따르면 왕세자의 결혼 기념으로 같은 해 4월에 결혼한 부부 모두에게 쇼다 가문에서 기념수를 보냈다고 한다.
밋치 붐의 열풍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5개월 후, 미치코 왕세자비는 임신을 하게 된다. 모교 세이신여자대학교에서는 밋치 붐에 이어 왕세자비의 임신을 축하하였고 학교의 자랑으로 여겼다고 한다.

왕세자비 출산 담당기자까지 생겨났고 히로노미야(현 일왕의 어린 시절 이름)가 태어나기 전부터 고쿄(일본 황궁) 앞에 여고생들이 몰려들었다. 1960년 2월 23일, 손의 탄생이 발표되자 곳곳에서 만세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 이후로 아키히토 왕세자 부부는 1989년 쇼와 일왕의 승하로 헤이세이시대(1989-2019) 일왕이 되었고, 왕실 최초로 상왕이 되어(일반적으로는 사후에 아들이 일왕이 되는데 생전 즉위를 했다) 2019년 5월 1일, 레이와시대를 맞이했다.
(기사 작성: 청년기자단 송정수 기자)
*본 기사는 JK-Daily 청년기자단에 의해 작성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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