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과학에서 제국으로 - 후쿠자와 유키치의 근대

 “이처럼 당시 일본인들은 의학과 화학을 주로 공부했다. 그렇다면 물리학은 사정이 어땠을까? 영국의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저술해서 고전 역학을 집대성했지만 일반인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하지만 유키치는 달랐다. 물리는 ‘물질의 이치’, ‘물질의 성질’ 혹은 ‘물질의 도리’를 해명하는 분야이면서 삼라만상의 법칙성에 이르는 서양 학문의 왕자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더욱이 그는 물리가 적성에 맞았다. 물리의 세계에서는 신분의 상하와 관계없이 누구나 공평하기 때문이었다.” 고토 히데키


 1930년부터 1984년까지 54년간 일본 1만엔권 화폐를 장식한 인물은 쇼토쿠 태자였다. 하지만 1984년부터 후쿠자와 유키치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지폐에 새겨진 상징으로만 따지면, 일본에서 그는 한국의 이순신 혹은 세종대왕 같은 존재다. 한국 지폐에 새겨진 인물 대부분이 근대화 이전 조선시대의 위인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19세기의 인물을 국가의 상징으로 세운 일본과 한국의 문명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확연히 달라 보인다. 그 방식과 결과에 관계 없이, 일본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자신들의 것으로 내재화하는데 성공했고, 과학기술을 통한 근대화를 통해 이전 시대와의 구분이 가능해진 반면, 한국은 아직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


유학에서 실학으로, 윤리학에서 물리학으로

 “물리학에 기초하는 자연정복이야말로 문명이라고 하는 세계관에서는, 동시대의 중국이나 조선은 무력을 사용한다고 해도 보호해야하는 존재라고, 그리고 문명으로 이끌어야 할 존재라고 후쿠자와는 인식하게 된다. 그의 유명한 <탈아론(脫 亞論)>에서 “중국, 조선의 지식인이 미혹이 심해서 과학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이라고 한 것도 동일한 발상이 근저에 깔려 있다. 후쿠자와에 있어서의 ‘실학’의 행선지는 “과학제국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성근

<일본 과학기술 총력전>이라는 책에서 일본의 재야 물리학자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19세기 중반 변화하던 세계의 정세를 증기와 전기라는 과학기술의 성과로 표현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책 <서양사정>을 소개한다.


“후쿠자와가 1866년에 쓴 <서양사정>의 표지에는 ‘증기제인전기전신蒸汽濟人電氣傳信 증기가 사람을 돕고, 전기가 소식을 전한다’라는 글씨가 크게 쓰여 있다. 표지 중앙에 전신선으로 둘러싸인 지구, 아래에 증기선과 증기기관차가 그려져 있다. 메이지유신 직전의 후쿠자와에게 서구 과학기술은 페리가 지참한 최첨단 기술인 증기기관과 유선 전신으로 상징된 것이다. 후쿠자와는 1881년 서구 근대가 성취한 이 변혁을 다시 언급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근대 일본의 사상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흔히 “문명주의의 횃불을 높이 내걸고 일본의 근대화, 민주주의를 선도”한 사상가로 기억된다. 하지만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나서 그는 돌변해 조선침략과 식민지배를 사상적으로 부추기기 시작했고, 그의 초기 민권주의 사상과는 결별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메이지 시대의 지식인 후쿠자와는 ‘일본 근대의 스승’이라는 평가와 ‘아시아 침략의 사상적 주범’이라는 평가 사이에 위치한 묘한 인물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1835년 오사카의 나카츠번에서 하급 무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유학자 시라이시 쇼잔의 학숙에서 공부했던 그는 1854년 난학을 배우기 시작해 1858년에는 난학숙의 교사로 발령받는다. 1860년엔 미국에, 1862년엔 유럽에 방문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서양사정>, <학문의 권유>, <문명론의 개략>등을 연이어 발표하며 “세계와 격리되어 있던 당시 일본사람들을 계몽해 나갔”다.


 후쿠자와를 비롯한 당시의 많은 일본 지식인들은 서양의 제국주의 세력이 보여주는 기술적 진보는 “모두 과학 이론, 특히 물리학에 근거해 형성”되었다고 간주했다. 즉, “후쿠자와는 서구의 기술은 과학에 의해 뒷받침되는 과학기술”이라고 이해했다. 서양에서는 18세기가 되어 서로 하나로 합성되는 과학과 기술이라는 두 분야가, 일본의 근대적 지식인에게서는 과학기술이라는 새로운 ‘실용의 학문’으로 받아들여졌다. 후쿠자와에게 “서구에서 태동한 과학이론의 진리성과 우월성을 담보하는 것은 실제적 응용 가능성과 현실성 그 자체”였다. 실용성을 서양문명 수용의 최우선 가치로 삼는 이런 태도는 후쿠자와 뿐 아니라 메이지 초기 일본의 서구과학 수용의 기조로 작동했다. 특히 당시 서구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던 증기기관과 전신을 비롯한 에너지 혁명이야말로, 후쿠자와와 메이지 시기 지식인들에게는 과학 그 자체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후쿠자와는 과학을 철저히 그 실용성의 측면 즉 기술로 받아들이면서도,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형이상학 체계인 유학의 세계관을 전복하기 위해 물리학을 새로운 형이상학 체계로 받아들였다. 이런 측면에서 후쿠자와의 철학적 기조는, 그의 사후 미국에서 태어나 서양 철학의 인식론을 과학이라는 창을 통해 자연화시킨 콰인을 닮았다. 콰인의 자연주의적 태도는 미국 실용주의의 창시자 중 한 명인 듀이에게 물려받은 것이며, 콰인의 자연주의는 과학을 넘어서는 철학, 즉 제 1철학이라는 이념의 추구는 포기되어야 한다고 천명한다.


 “지식, 정신, 의미는 그것들이 관계맺고 있는 동일한 세계의 부분이며, 자연과학을 고무하는 것과 동일한 경험적 정신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자연과학에 선행하는 철학의 여지는 없다.”


 콰인이 수행한 ‘인식론의 자연화’는 “곧 과학적 탐구와 철학을 동일시함으로써, 인식론을 과학에 부수적”인 일종의 과학으로 만든다. 콰인에 따르면 수백년 동안 철학이 독점해온 인식론의 영역은 더이상 철학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되며, 인식론은 반드시 현행 과학탐구의 한 부분으로 수행되었을 때 의미를 가진다. 콰인은 인식론을 연구하고자 하는 철학자는 “인간의 과학의 획득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경험적 심리학자”가 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즉, 인식론은 자연과학의 한 분야인 심리학의 한 분야로 포섭된다는 것이다. “철학은 과학을 위한 선험적 입문이나 토대가 아니라, 과학에 연속적이다. 과학과 철학은 같은 배 안에 있다. 외부의 요지는 없으며, 제일철학도 없다”라는 콰인의 선언은, 이후 현대철학의 인식론 연구가 실제로 과학의 영역으로 포섭됨으로써 증명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유학을 과학으로, 윤리학을 물리학으로 전회시킨 업적은, 콰인보다 수십년 전에 근대과학이 탄생하지 않은 동양에서 태어난 한 지식인의 사상 속에서, 이미 철학이 과학에 의해 자연화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성과다.


과학에서 제국주의로

 “요즈음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문명의 중심이 되고, 타국의 선구가 되어 서양 여러 나라에 대치하고 있는 것은 일본 국민이다. 동아 시아의 보호는 일본의 책임이라고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양의 여러 나라, 특히 이웃 중국이나 조선 등이 우둔하여 서양문명 의 기세에 대치하지 못하는 것은 나무로 된 판잣집이 화재에 견디지 못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우리 일본의 무력을 사용하여 이 나라 들을 응원하는 것은 단순히 타국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해 서 행하는 것임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문무의 힘으로 이 나라들을 보호하고 유도하여, 곧바로 일본처럼 지금의 문명의 경지에 도달시 키지 않을 수 없다. 혹은 부득이한 경우에는 무력으로 그 진보를 협박하는 것도 있을 수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

 후쿠자와의 유명한 책 <학문의 권유> 첫 문장은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아래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로 시작한다. 이 문장은 일본의 교과서에도 등장하며, 후쿠자와 유키치의 초기 자유민권사상을 압축하고 있는 문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서양에서 과학과 더불어 자유민권주의를 받아들인 후쿠자와가 마주한 상황은, 국가 단위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이었다. 이런 제국주의 경쟁 하에서, 과학기술은 산업 발전과 군사력 강화의 핵심 축이었고, 국가가 과학기술의 진흥과 혁신을 적극 지원하는건 당연한 일이었다. 즉, 후쿠자와의 자유민권사상은 처음부터 제국주의하에서의 국가 간 경쟁을 기저에 깔고 자라났다.


  <학문의 권유>가 첫 문장에서 자연적 인간에게는 차별이 없다고 선언하면서도, 바로 그 다음 문장에서 현실에서 보이는 빈부격차와 능력의 차별을 거론하며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지혜가 없고, 지혜가 없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라고 덧붙이는 이유는, 단순히 학문의 배움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쟁에 의한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는 후쿠자와의 사회진화론적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후쿠자와에게 물리학은 중국의 전통적 유학을 대치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절대적 진리였다. 후쿠자와가 “지금의 문명학을 문명으로 하고, 이것을 일본 및 중국의 고학(古學)과 비교하여 양자가 서로 다른 점을 구하면, 단순히 물리학의 근본에 의거하거나 의거하지 않았다는 차이 뿐이”라고 과감하게 말할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근거는, 서양 기계문명의 출발점이자 서양문명의 강대함의 바탕이 되는 원인, 즉 근대과학혁명을 이끈 뉴턴의 수학적 물리학과 역학체계였다.


 이런 점에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과학사상은 뉴턴 역학에 대한 반동으로 탄생한 독일 칸트의 철학사상 및 뉴턴의 근대과학혁명을 프랑스로 수입해 왕권과 종교의 독단과 싸우는 계몽정신의 기반으로 활용했던 볼테르의 계몽사상과 비슷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제국주의의 확산으로 국가간 경쟁이 심화되던 시기에, 일본에서 활동하던 그에게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힘의 원천은 서양의 과학기술이었고, 바로 그 과학에의 맹신이 후쿠자와가 이끈 계몽주의를 지탱하게 만드는 핵심이었다. 그리고 과학에 대한 지나친 맹신은 위험을 내포할 수 밖에 없다.


 후쿠자와는 1885년, 그가 김옥균을 통해 후원했던 조선의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후, <탈아론>이라는 논설을 발표한다. 바로 이 글에서 후쿠자와는 서양으로부터 불어오는 문명의 바람에 맞서지 못할 바에야, 그 문명의 파도에 실려 함께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세상이 이런 난세임에도 학교에서는 유학의 인의예지와 허례허식만 가르칠 뿐 과학을 멀리한다고 탄식한다. 이러한 그의 탄식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이 바로 중국과 조선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망국적 타락의 징조들이었다. 그는 중국과 조선 정부처럼 전제정치를 고수한다면 서양인들은 일본에 법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길 것이며, 중국과 조선사람들처럼 과학을 모른다면, 서양 학자들은 일본도 음양오행을 따르는 구태에 빠져 있다고 생각할 것이라 우려한다. 따라서 후쿠자와가 보기에 일본이 살아남는 최선의 길은, 조선이라는 오래된 나쁜 친구와 절교함으로써 서양 문명의 대열에 합류하는 것이 된다.


 후쿠자와의 <탈아론>에서 논증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화두, 즉 일본이 조선과 결별해야 하는 절실한 차이로 주목 받는 존재는 바로 ‘과학’에 대한 두 국가의 관점과 태도였다. “<탈아론>에서 과학은 개인의 지적 자유와 독립을 넘어 곧 국가의 생사를 가르는 중요한 지적 도구로 자리잡”았고, 이는 과학이라는 ‘지적 우월성’의 이미지를 통해 식민지 개척의 정치적 명분과을 찾았던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 유사한 사상적 결론에 도달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후쿠자와의 태도가 갑신정변으로 돌변했다는 평가가 있지만, 후쿠자와가 과학을 제국주의적 맥락에서 받아들였고, 그의 과학사상에 제국주의적 면모가 항상 잠재하고 있었다는 점은, 불과 3년전인 1882년에 <조선의 교제를 논한다>라는 논설을 통해 조선이 미개하다면 무력을 통해서라도 진보를 도와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서도 잘 알 수 있다. 1883년 쓴 <외교론>에서는 세계 각국의 대치 속에서 짐승들이 서로 잡아 먹는 형국이라면, 일본은 잡아 먹는 쪽이 되어 좋은 먹이를 구해야 한다는 문장이 등장한다. 마침내 그의 태도는 1894년 청일전쟁 상황에서 발표된 <일청의 전쟁은 야만과 문명간의 전쟁이다>라는 논설에서 정점에 이른다. 열렬한 자유민권사상가이자, 심지어 여성민권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던 근대적 인간 후쿠자와의 과학사상은, 결국 중국과의 전쟁을 “야만과 문명의 전쟁”으로 정당화하는 제국주의 사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후쿠자와와 비슷한 시기 <이학종>이라는 책으로 ‘자연과학의 종교 혹은 도덕’을 주장한 스기우라 주고 또한, 당시 서양의 최신 과학이론을 과도하게 사회변혁이론에 도입하는 오류를 보여준다. 그나마 사회체제와 과학이론의 경계를 분명히 인지했던 후쿠자와와는 달리, 스기우라는 아예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복잡한 현상들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정조차도 물리학의 ‘에너지 보존법칙’으로 환원함으로써 자연과 인간 사회의 법칙을 하나로 관통하는 통일 이론을 구축하고자 했”다. 과학의 토대 위에 종교와 도덕을 세우려 했던 시도는 당시 영국의 과학자 토머스 헉슬리의 <과학과 윤리> 등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태도였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여러 존재들에 불가지론을 표방했던 헉슬리와는 달리, 스기우라는 자연과학의 절대성을 맹신하는 과학주의자에 가까웠고, 과학에 대한 이런 그의 맹신은 그를 후쿠자와와 비슷한 국가주의자의 자리로 유도하게 된다.


 후쿠자와와 스기우라가 물리학을 축으로 과학주의자/국가주의자/제국주의자가 되었다면, 가토 히로유키는 진화론을 중심으로 한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통해 인문사회과학 모두를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계몽운동을 펼쳤다. 초기에 민권운동가였던 가토 또한 이런 과학주의에 대한 맹신으로 결국 국가주의자로 변질되어 간다. 이들 모두에게 “과학에 대한 확신이 강화되면 될 수록, 그것은 일본의 아시아 인접국에 대한 식민지적 침탈을 정당화시켜주는 도구로 탈바꿈”되었다. 근대 일본에서, 과학제국주의의 피해자였던 일본은 메이지 시기 개혁의 시기를 지나며 과학제국주의의 가해자로 변모했다.


 과학을 절대적으로 맹신하는 과학주의가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적 이념을 만날 때 벌어지는 참극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자주 발견할 수 있다. 18세기에서 19세기 제국주의의 확산에 기여한 인류학과 사회진화론의 이론들 뿐 아니라, 20세기 독일과 미국에서 광범위하게 인종차별의 근거로 사용된 우생학의 역사는, 과학을 사회의 진보를 위해 현명하게 사용하는 일이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일본 메이지 시기에 나타났던 ‘과학제국주의’는, 과학기술이 사회와 건강하게 조우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몇가지 결계의 필요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계는 단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반대하는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과학적 사회가 가능하기 위해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사회적 제도의 필요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일본 과학기술총력전의 역사는, 더 나은 과학적 사회를 위해 인류가 반드시 치열하게 분석해야 할 수많은 교훈을 담은 저장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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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우재 교수
- 중국 하얼빈 공과대학교 생명과학센터 조교수
- 포항공과대학교 생명과학과 박사
- 저서 <플라이 룸>, <선택된 자연> 등
- 동아사이언스, 한겨레 등 다수 매체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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