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결혼식은 교회에서, 장례식은 절에서

 일본사람들의 관혼상제에 관한 의식의 일단을 보여주는 말이다. 교회라고 하지만 이는 기독교 자체 보다는 서구적 풍습 정도를 뜻한다고 봐야 한다. 일본의 기독교세는 우리에 비할 바가 못된다. 국내 신학자들이 일본 신학대학을 방문하면 마치 삼국시대 불교를 전하러 일본을 간 한국 승려들 대하듯 할 정도로 신도도 적고 교세도 미미하다. 대신 일본 불교학의 수준은 세계적이다. 그런 일본이니 교회란 ‘서구식 풍습’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결혼식이야 앞뒤 따지지 않고 식의 멋만 생각하면 되니 서구식 결혼식 선호가 전혀 기존의 일본 문화와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장례식은 조금 다르다. 장례식은 죽음과 탄생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대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여기서 절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특정한 장소나 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생관을 암시한다. 일본인들의 사생관은 서구화된 지금도 여전히 불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일본의 불교는 우리와 여러 면에서 다르다, 그 가운데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신불습합(神佛習合)이다. 우리 사찰에 있는 칠성각, 산신각 등은 토속신을 모시는 곳이다. 승려들이 점을 보기도 한다. 우리 불교에 무속과 결합된 무불습합(巫佛習合)의 경향이 있듯이 일본에는 신도와 불교가 결합된 신불습합의 전통이 있다. 우리와 차이점은 신도에서 말하는 토속신의 위상이 부처나 보살보다 높거나 동등한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예컨대 석가여래불과 약사여래불 그리고 아미타불이 현세에 나타났던 모습이 각기 신도의 오오나무찌노가미(大己貴神), 오오야마구이노가미(大山昨神), 다고리히메노가미(明心姬神)라고 믿는다. 조상신이나 자연신도 매우 높게 대우하는데 교토의 동, 서 혼간지에 가면 정토진종의 개조인 신란(親鸞)를 모시는 조사당(祖師堂)이 부처를 모시는 불전(우리의 대웅전)보다 크고 중심에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일본인의 두 가지 기질이 떠오르는데 하나는 현세중심성이고 다른 하나는 감각중심성이다. 현세중심성이라는 말은 기독교나 불교에서처럼 죽은 후의 세상이 아닌 현재의 생에서 얻을 이득을 중시한다는 뜻이다. 일본을 여행하면 사찰이나 신사 입구에 소원을 적어 넣은 종이를 꼽거나 명패를 걸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현세의 복을 받기 위해서다. 기복문화야 우리도 있지만 일본만큼 공식화되어 있지는 않다. 내세관이 정교하지 못한 신도를 믿는 일본인들은 숙명적으로 “생의 허무함”을 이고 살아가야 한다. 그런 이들이기에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죽은 후가 아닌 현생에서 얻을 이득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하다.


 감각중심성은 오감을 통해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을 사고의 주된 재료로 삼는다는 뜻이다. 한중일 삼국은 모두 감각중심성이 강한 편이지만 상대적으로 우리가 가장 약하다. 약한 만큼 추상적 사고는 우리가 상대적으로 강한 것 같다. 우리 미술이나 문학에 등장하는 은유적 표현이 많은 것은 그런 증거의 하나다.


 현세중심성과 감각중심성이 결합해 생겨난 문화가 일본 특유의 탐미주의다. 아름다움을 탐하지 않는 문화가 있으랴마는 굳이 탐미적이라고 할 때에는 숭고미, 장려미 또는 다양한 정신적 아름다움보다 감각적 아름다움에 치중하는 경향을 뜻한다. 쉽게 말해 모양, 색, 질감 등 지금 당장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아름다움의 추구다. 예컨대 눈으로 먹는다는 일본 요리, 꽃꽂이, 분재, 정원 등이 모두 탐미적 문화의 소산이다.


 감각중심성은 상상 속 존재인 부처를 더 감각적 구체성이 강한 조상신이나 자연신의 관점에서 이해하려 애쓰게 만든다. 쉽게 말해 일본인들에게 체화된 신도의 체계 속으로 불교를 집어넣게 만든다. 그들은 더 나아가 같은 공간에서 숨쉬고 있는 천황조차 이 틀 속에 집어넣는다. 신궁의 본종인 이세신궁(伊勢神宮)은 천황의 조상신을 모시는 곳이다.


 어찌 보면 신도는 이렇게 불교나 현실세계와 쉽게 습합할 정도로 유연하고 개방적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발전된 내세관이나 나름의 윤리적 가치를 만들어낼 정도의 견고한 교리적 틀을 갖추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신도는 이렇다 할 교리가 없다. 경전도 없어 일본고사기를 경전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고등종교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정교분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기독교나 불교와 같은 발전된 내세관이 개발되면 천황의 위치가 애매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적잖게 작용하는 것 같다. 에도시대에 일본은 숭신억불(崇神抑佛)정책을 펼쳤고 메이지 천황은 1868년 ‘신불분리령’을 제정해 불교를 탄압했다. 그러나 그것은 외형적인 모습일 뿐 신도가 현대사회에서 종교로서 나름의 기능을 수행하자면 불교 혹은 기독교와의 습합을 도모할 수 밖에 없다.


 극우세력을 중심으로 시작된 복고신도운동도 천황제를 중심으로 재무장을 하고 전통적 가족형태의 부활을 꾀하는 등 다분히 반동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했듯 자연종교 수준에 머물고 있는 신도로는 부족하다. 신도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일본회의의 모태는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심지어 현대과학까지 섞여 1930년대 설립된 “생장의 집”이다. “생장의 집”은 일본은 신이 지도자로 정한 국가이며 일본 천황이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일본 중심적 주장을 한다.


 자민당 의원의 약 90%는 이 일본회의 소속이다. 자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해왔던 공명당은 창가학회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나무묘법연화경’ 그러니까 나무묘호렌게쿄라는 7자만 외우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일연종(日蓮宗)의 교리를 계승하고 있다. 이 창가학회 한국지부에서 발간하는 ‘화광신문(華光新聞)’은 국내대학 등 여러 곳에서 무료로 배부된다. 내가 근무하는 대학에서도 수십년 간 배포되다가 무슨 이유인지 최근 들어 보이지 않는다.


 일본은 기초과학과 의학이 매우 발전한 나라다. 의과학 분야 노벨 수상자만 25명이나 된다. 일반인들의 과학적 소양도 대단하다. 일본에서 출간되는 과학 대중서의 질과 양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일본이고 그들이 모범으로 삼던 유럽의 기독교세는 점점 약화되고 있는데 왜 일본은 정치마저 종교에 발목이 잡혀있는 것일까? 그들의 머리 속은 칸칸이 나뉘어 과학적 사유의 공간과 종교적 사유의 공간이 분리되어 있는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하게 된다.


 여기서 다룰 수 없는 수많은 역사적 요인들이 얽히고설켜 현대 일본 정치와 종교의 결합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예컨대 일본 불교의 또 다른 특색으로 꼽는 진호국가설(鎭護國家說)은 메이지시대에 극에 달하는데 국가와 불법(佛法)의 일치를 주장하며 불교의 정치적 지배를 기도했다. 불교의 이런 국가주의적 전통은 앞서 말했듯 신도와 섞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런 흐름 들이 사라지지 않고 끈질기게 생명력을 이어가는 것을 역사, 정치, 경제 등에 토대를 둔, 표층 문화에 대한 논의만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까? 표층문화가 자라나는 감성적 토양, 예컨대 감각중심성, 현세중심성과 같은, 심층의 요인들을 논의에 포함시켜야 하지 않을까? 


<필자> 지상현 교수
- 한성대학교 디자인대학 교수
- 한성대학교 예술대학 학장
- 연세대학교 대학원 심리학과 박사
- 저서 『안타고니즘(한중일의 문화심리학)』(2020)등 다수.

<저작권자 ⓒ JK Daily,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