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이 형성되던 19세기에 통계는 응용수학이 아니라 국가적.정치적 사안에 대한 기술(記述)이었고, 하필 19세기가 사회학의 탄생을 보게 된 것은 그 통계를 통해 대량적 사회현상의 규칙성에 주목함으로 써였다. 사회학이 태동한 것은 사후(事後)에 목적론적으로 재구성된 ‘사회사상’의 전통 속에서가 아니라, 경찰과 풍속, 역사철학과 범죄통계가 뒤얽히던 근대의 뒷 골목에서였던 것이다.” 서호철
통계학이 독자적인 학문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의 전반기의 일이다. 통계학사를 연구해온 조재근 교수에 따르면 “19세기가 끝날 때까지 통계학은 독립적인 과학의 한 분야가 아니었고 기본적 으로 다른 분야를 위해 데이터를 생산하고 정리하는 도구 역할”만을 담당했고, “17세기 이래 다양한 통계적 방법이 개발되어 쓰이고 있었지만 대부분 경제나 사회 현상을 연구하는 여러 분야에서 제각각 보조적인 역할”만 수행하던, 소위 ‘이론 없는 활용의 시기’를 몇 세기나 지속하고 있었다.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중반까지의 ‘확률의 시대’를 거쳐,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전반까지의 ‘오차이론의 시대’까지, 통계학은 17세기 시작된 물리학의 과학혁명에 거의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 17세기 근대과학이 추구’했던 ‘확실성 추구의 시대정신’ 속에서 “당시 과학계 전반의 지적 분위기에서 ‘결정론(determinism)’이 차지하던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인간의 지적인 능 력이 못 미쳐서 확실히 알 수 없을 뿐 사실은 엄밀한 인과법칙을 따른다는 결정론적 사고는 특히 뉴턴이 등장한 이후 과학계 전체에 널리 퍼져 있었”던 시대에, 통계학의 목표는 “측정을 통해 단 하나의 참값을 알아내는 것” 뿐이었다.
따라서 라플라스 등에 의해 개발된 최소제곱법의 목표는, 천문학과 측지학 등에서 나타나는 오차를 설명하려는 노력일 뿐이었다. 예를 들어, 18세기 후반브타 19세기 초까지 프랑스는 의욕적으로 전세계를 탐사하기 위해 탐사대를 파견했고, 바다에서 경도를 재는 문제에는 엄청난 상금이 걸려 있었다. 18세기 중 후반 오차이론이 급속히 발전한 이유는, 이런 프랑스의 사회적 맥락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다. 19세기가 오기전까지, 대부분의 과학자들에게 통계란 그저 확률과 오차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에 가까웠다. 통계가 사회와 국가에 대한 과학을 구축하는 필수적인 학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벨기에에서 태어난 과학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케틀레와 국가통계의 시대
아돌프 케틀레는 1796년 벨기에에서 태어나 1847년 죽을 때까지, 통계학의 근대화를 통해 사회통계학을 정초한 인물이다. 천문학을 공부했던 그는 자연스럽게 오차이론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라플라스나 푸리에가 통계에 수학을 이용했던 점에 착안해, 물리학의 성과를 인간사회에 적용하는 ‘사회물리학’을 제창하기에 이른다. 그는 자신의 이런 생각을 1835년 <인간과 능력 개발에 대하여>라는 책으로 발표하는데, 여기에서 인구, 출생, 사망, 체구, 범죄 등의 통계자료들을 통계학적으로 분석하면, 무분별해 보이는 사회현상에서도 규칙성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인간의 특성이 정규분포를 그리며 대부분의 인간은 그 중간값인 평균에 집중되어 있다는 ‘평균인’의 개념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평균인’ 개념은 일종의 사회통제의 정상적인 기준이자 이상형을 제공하는 것으로 각광을 받았으며, 케틀레의 사회통계학은 통계학의 범위를 자연과학을 넘어 사회과학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된다. 특히 케틀레가 활동하던 19세기 초반은 유럽 각 국에서 국민국가가 형성되던 시기였고, 각 국은 활발하게 통계조사를 실시하며 이를 인쇄물의 형태를 통해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었다. 통계학을 국가통계와 사회과학의 영역으로 확장시킨 케틀레의 주도로, 1853년 국제통계회의 International Statistical Congress, ICS 등의 조직이 생겨나게 되었고, 케틀레는 초대 의장이 된다.
케틀레는 국가통계라는 분야의 선구자였으나, 그 자신은 여전히 결정론적 세계관 속에서 사고하던 인물이었다. 그가 자신의 학문에 ‘사회물리학’이라는 이름을 붙힌 이유 또한, 그가 국가통계를 통해 사회의 법칙을 찾으려했던 노력의 일부였던 셈이다. 따라서 그의 ‘평균인’ 개념 속에서, 평균에 속하지 못하는 이들은 모두 오차로 취급되었다. 천문학에서 참값을 측정하는 과정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나타나는 오차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큰 문제가 없지만, 사회학에서 평균인을 측정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오차를 비정상 혹은 일탈로 가정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케틀레의 시대, 혼인, 이혼, 범죄, 부랑, 자살, 매매춘 등을 대상으로 하던 ‘도덕통계’는 도덕과 풍속의 문제를 당위적이고 규범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넘어, 사회도덕의 규칙성을 탐구하는 접근으로 나아가게 만들어주었다. 케틀레 이후, 근대국가를 추진하던 모든 사회에서 통계학은 가장 필수적인 학문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 일본의 계몽지식인들은 근대국가를 추진하기 위해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스기 고지와 일본 통계학의 탄생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유신이 이루어지는 시기, 일본 역시 근대민족국가로의 이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근대국가에서 과세와, 징병, 의무교육 등 원활한 ‘행정’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엄밀한 사회통계조사가 필수적이라 할 수 있”고, 19세기 중후반의 일본은 서양에서 다른 과학분야들을 흡수하던 것보다 더 적극적으로 통계학을 받아들이고, 정부에 통계기관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수행했던 인물은 스기 고지(1828~1917)다.
스기 고지는 나가사키에서 평민 출신으로 태어나, 오사카 오가타 고안의 데키쥬쿠에서 공부하고, 에도의 난학숙에서 가르쳤으며, 일찍 서양학문을 접했던 그는 메이지유신 이후 메이로쿠샤에 참가해 활동하기도 했다. 메이로쿠샤에서 통계학에 가장 먼저 눈을 뜬 인물은 스기 고지였다. 그는 서양에 대한 조사연구 및 번역을 목적으로 설립된 ‘반쇼시라베쇼 蕃書調所’에서 네덜란드의 통계연감을 읽으며 흥미를 느꼈고, 막부말기 그가 바라는 통계조사를 실행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으로, 통계학에 대한 공부를 심화하고 이후 메이지유신이 일어나자 정부의 통계 실무자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스기 고지 외에도 일본의 서양 번역어 작업에 혁명을 일으킨 니시 아마네와 후쿠자와 유키치 또한 통계학의 중요성을 일찍 간파하고 통계학 관련 서적의 번역을 서둘렀다. 하지만 이 중 끝까지 통계학에 대한 관심을 끌고 나간 인물은 스기 고지 뿐이었다. 특히 후쿠자와는 통계학이라는 학문보다는 국가통계를 통해 국력을 비교하는 데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메이지정부 또한 후쿠자와와 비슷한 전략을 추구했고, 1871부터 각 부처에 통계과를 설치하기 시작한다.
메이지정부가 중앙집권적 개혁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인구조사가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호적조사를 통한 인구조사를 추진하려던 정부에 맞서 스기 고지는 호적이 아니라 통계조사를 통해 인구조사를 실시해야 한다고 반발했고, 그의 생각은 1871년에 받아들여져 1871년 12월 태정관 정표과에서 스기 고지는 4명의 직원과 함께 일본 역사에서 처음으로 통계연표 작성을 시작하게 된다. 스기가 서양의 센서스와 같은 방식의 인구조사를 끊임없이 주장한 덕분에, 일본은 1879년 야마나시현에서 첫 인구조사를 실시하게 되었고,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적 국가통계를 작성한 나라가 되었다.
국가통계는 양날의 검이다. 국가는 이를 통해 사회와 인민을 통제할 수도 있고, 정밀하게 작성된 통계자료를 통해 빈민층을 구제하고 사회의 평등을 위한 정책을 추진할 수도 있다. 스기는 초기 일본의 민권운동가들로 구성된 메이로쿠샤의 일원이었으며, 신분해방과 사민평등을 주장하던 메이지 초기의 계몽지식인이었다. 따라서 스기의 인구조사 방법론에는 저밀한 통계적 방법론을 동원해 얻은 통계자료를 가지고, 사회문제에 대응하려는 그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었다.
이를 위해 스기는 관립 통계교육기관을 설치할 것을 거듭 건의했으나, 메이지정부는 경비 부족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스기는 1882년 의연금 모집운동을 통해 1882년 11월 교리쓰통계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이후 도쿄제국대학으로 통계학교육의 헤게모니가 넘어가게 되지만, 교리쓰통계학교는 일본의 통계기관 및 통계교육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스기는 일본의 민권운동을 위해 국가통계의 근대화를 추진했으나, 이후 일본이 제국주의국가로 변모하면서 스기가 정초한 통계학은 식민지를 통제하기 위한 국가통계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동아시아의 통계학사는, 민권운동가의 치열한 희생과 제국주의의 슬픈 역사 사이에 놓여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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