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말 이래 일본은 긴장관계에 있던 서양으로부터 민족으로서의 자립의 원리를 모색하면서 동시에 그 자립을 실제로 가능하게 하는 ‘문명’의 원리를 모색하며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일본 국가가 자주적으로 근대화해야 한다는 인식과 직결하여 서양 학문, 특히 국제법과 같은 서양 ‘사회과학’을 선별적으로 도입하고, 그것을 메이지 국가 체제를 정립하기 위한 교육체제 속에 제도화하였다. 메이지정부가 선별적으로 도입한 국법학과 국가학은 초기 일본 사회과학의 성격을 특징지웠다.” 전상숙
후쿠자와 유키치가 메이로쿠샤에서 민권론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면, 같은 메이로쿠샤에 소속되었지만 후쿠자와 유키치의 반대편에서 국권론을 상징했던 인물은 가토 히로유키다. 막부 말기, 메이지유신 초기에 일본 지식인계는 민권론자와 국권론자 사이의 치열한 대립이 존재했고, 메이지유신이 진행되면서 점차 형세는 국권론의 우세로 기울어지게 된다. 초기에 후쿠자와와 함께 민권론 계열에 속해 있던 가토 히로유키가 국권론자로 변모하게 된 계기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그가 1876년 독일의 정치학자인 요한 카스파 블룬칠리 (Johann Caspar Bluntschli, 1808~1881)의 <일반국법>을 <국법범론 國法汎論>으로 번역하면서, 그의 학문적 방향을 국가와 일체시키기로 결심했고, 1879년의 유명한 강연에서 진화론을 통해 천부인권설을 부정하게 된 것으로 그 궤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하지만 현대 일본의 국가적 성격에 기여한 한 사상가의 변심이 그런게 단순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토의 변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일본에 도입된 사회과학의 성격과 그 사회과학에 영향을 미친 생물학의 관계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일본 사회과학의 탄생
사회과학은 17세기 근대과학혁명 이후에 과학적 방법론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기 시작한 학문이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과 같은 근대과학의 후손들이 가치중립적이라는 원칙과 이상을 학문적 방법론의 중심에 두고 있는 반면, 근대과학으로부터 물려받은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과학’이라는 외피를 두르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사회과학은 그 역사적 기원부터 가치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임마누엘 월러스틴의 말처럼, “가치로부터 자유로운 사회과학은 없다”고 해도 크게 틀린 명제는 아닐 것이다.
근대과학처럼 서양이라는 뚜렷한 기원을 가진 사회과학은, “서유럽인들이 자신들의 이성에 대한 신뢰에 근거하여 발전시킨 것으로, 전적으로 ‘근대적’인 ‘서구적’ 사고방식”을 내포하고 있다. 강정인에 의하면, 19세기 유럽이라는 시공간에서 ‘사회에 대한 과학’으로 출현했던 사회과학은 그 자체에 내포된 이데올로기적 성격과 서구중심주의에 기초해 있고, 따라서 모든 사회를 단일 발전 경로에 따라 서열화하는 특성을 지녔다. 18세기 프랑스대혁명을 이끈 계몽사상가들에 의해 강화된 바로 이 서구중심주의를 모델로 하는 진보의 보편적 기준은, 일본으로 전파되면서 독특한 전회를 겪게 된다.
19세기말 서양 제국주의 세력에 대응하던 동아시아 각국은 모두 “쇄국의 마음을 가지고 개국의 정치를 행”할 수 밖에 없었다. 과학기술과 산업혁명으로 탄생한 서양세력의 무기와 기계들이 동아시아 권력자들과 민중에게 경각심을 심어주었다면, 서양의 근대과학과 사회과학의 보편성은 지식인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동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학문적으로 서양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건 일본이었고, 일본 메이지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서양학문 수용은 20세기 일본의 운명을 크게 바꾸는 잠재력의 원천이 되었다.
당시 메이지 체제를 뒷받침하던 사상가들에게 주어진 과제에는 두 가지 방향의 현실주의적 목표가 있었는데, 그 둘은 첫째, 메이지 국가와 구체제와의 단절을 꾀하고, 둘째, 서양에 대항하는 부국강병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메이지 정부는 서양학문의 적극적인 도입을 시도했는데, 이 중에서도 ‘국제법’ 같은 서양의 ‘사회과학’이 선별적으로 도입되었고, 그 선별과정의 기준은 “메이지 국가 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이었으며, 이렇게 선별적으로 도입된 국법학과 국가학 등의 사회과학은 향후 일본 사회과학의 성격을 특징짓는 계기가 된다.
블룬칠리와 생물학의 근대
이런 상황 속에서 일본의 근대교육기관 설립에 크게 공헌했던 외국인 교사를 대체하기 시작하던 도쿄대학을 중심으로, 일본의 사회과학자들은 1887년 ‘국가학회’를 결성하며 학문적으로 메이지 정부의 국권론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이 ‘국가학회’는 독일학 계열의 국가학 이론들을 대거 수입함으로써, 일본 사회과학계의 독일학 우위를 확정하게 된다. “메이지 국가에서 학문은 정치 및 행정과 분리”될 수 없었고, 독일의 국가학은 바로 이런 특징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토 히로유키가 번역한 블룬칠리는 입헌군주제의 당위를 인정하고 보수주의적 색채가 강한 정치학을 주창했던 인물이지만, 동시에 이러한 입헌군주제의 질서가 안정화되기 위해선 아래로부터 형성되는 국민국가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자유주의적 색채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가토 히로유키는 블룬칠리의 <일반국법>을 번역하면서, 자유주의적 색채를 제거하고 국권론을 지지할 수 있는 보수주의적 부분만 발췌한다. 가토는 “법과 정치가 국가와 불가분의 형태로 통일적”이라는 블룬칠리 <일반국법>의 주장 중 반쪽만을 번역해서, 이를 천황과 국민을 교육하는 교과서로 삼았다.
블룬칠리는 프리드리히 대왕에서 국가사상의 원형을 찾고, 근대국가란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일종의 정신과 육체를 구비하고 고유 의지를 갖는 공법적인 인격이라고 주장했다. 국가가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선, 바로 이런 국가의 인격인 정치권력이, 위계질서의 최상에 위치해야 한다는게 블룬칠리가 주장한 ‘국가유기체설’의 핵심논리였고, 가토는 바로 이 국가유기체설을 메이지 국권론의 옹호 논리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천황을 중심으로 통일된 국가체제를 건설중이던 메이지 정부에게, 블룬칠리의 <일반국법>은 절실하게 필요한 논리였다. 블룬칠리의 독일 국가학은 프랑스혁명 이후 유행하던 루소의 인민 주권론에 대항해, 권력자의 의지로 주권을 설명하는 논리였고, 민권론을 주장하던 사상가들과 대립하던 국권론자들에게 블룬칠리의 논리는 메이지 국가 성립의 정당성을 제공하는 확고한 논리체계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었다. 블룬칠리는 권력자로부터 나오는 주권은 국법의 틀 아래 인정되고, 주권자는 결코 국법을 초월해서 주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즉, 국법은 주권자의 의지 위에 존재하는 것으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것이었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블룬칠리가 동원한 은유가 바로 국가란 “법률적인 유기체”라는 명제였다.
”민족은 법률상 의미보다는 선천적인 의미에서 그 정신의 통일성을 언어로 표현하기 때문에 하나의 인격체로 불릴 수 있다. 그러나 그 공동체는 어떠한 법제도로 확정되지 않는다. 민족은 국법상의 인격체가 될 수 없다. 이와 달리 국가는 국민 속에서 온전한 신체를 갖추게 되면서 법률상의 인격체가 된다.”
국가와 국가를 이루는 국민을 하나의 유기체로 생각했던 블룬칠리의 국가유기체론은, 19세기 발전을 거듭하던 생물학에 영향을 받은 결과다. 18세기 백과사전학파의 돌바크와 디드로가 화학의 발전으로부터 자신들의 전투적 무신론의 정당성을 확보했듯이, 19세기 블룬칠리는 자신의 국법론의 근거를 생물학적으로 규명하려 했던 것이다. 이처럼 자연과학의 발견과 방법론을 사회과학적으로 변용하는 전통은, 서양의 사회과학에서 매우 흔하게 발견할 수 있었고, 바로 그런 가치를 노출한 사회과학의 전통은 일본의 사회과학에도 그대로 전승되었다.
블룬칠리에게 유기체 생물학이 자신의 학문적 권위를 정당화하는 도구였다면, 가토 히로유키의 무기는 ‘사회진화론’이었다. 흔히 가토 히로유키가 천부인권설을 부정하고 전향한 과정에서 우승열패를 강조하는 사회진화론이 영향을 미쳤다고 거론된다. 하지만 가토는 천부인권설을 부정하기 위해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그의 진화론 수용과정은 유교적인 ‘천’ 관념에 대한 그의 천착을 진화론의 법칙적 요소들이 해소해준 측면과 함께, 그가 받아들인 사회진화론의 경쟁원리는 국권론자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반대로 신분사회의 특권층이나 정치사회의 지배층을 극복하는 논리로도 사용될 수 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즉, 가토가 진화론을 수용한 것이 보수적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결론내리는건 섣부른 추측이다.
가토 개인의 보수화나 전향보다 중요한 점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근대과학의 사상적 측면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런 사상이 사회과학이라는 틀을 통해 현대의 일본이라는 국가의 성격을 규정했다는 점이다. 즉, 근대적 일본의 형성의 기저에는, 생물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이해 없이는 통찰이 불가능한 성격이 녹아 있다. 근대 일본은 국가를 유기체로 바라보는 독일 국가학의 생물학적 관점과, 국가간의 경쟁을 우승열패의 논리로 해석하는 국제법의 사회진화론적 관점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근대 일본의 형성과정엔, 사회과학에 적용되어 왜곡된 생물학의 흔적이 깊이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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