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비료와 백신 - 보이지 않는 근대화

츠다센의 서양농법 도입과 전통사회의 저항


“종두법의 창시자가 아니라 전파자란 점에서 그의 공덕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만,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다른 데 있다. 즉 주술적이고 비합리적인 민간의 신앙체계를 막 내리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를 열어갔다는 점에서 그의 역할은 작지 않았다.” 박천홍의 글, <주술적 세계관에서 민중을 해방시킨 ‘한국의 제너’ 지석영’ 중에서


 6살에 불과했던 자신의 딸 츠다 우메코를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에 유학시킨 츠다센은, 일본 근대 농학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츠다센은 일본의 메이지유신 초창기에 일본의 농학을 혁명적으로 근대화시킨 장본인으로, 일본 근대농업을 위한 초석을 닦은 것은 물론 조선의 안종수에게 근대적 농법을 전수했고, 이수정을 통해서는 기독교를 전파하기도 했다. 메이지유신 시기 일본의 근대화의 주역 대부분은 하급무사 출신이었고, 츠다센 역시 1837년 치바현의 무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에도의 난학숙과 영숙에 입학해 서양의 학문을 접한 그는, 1860년대 이미 미국을 경험하고 돌아와 새로운 두발을 선보이기도 했던 개화파였다. 그는 1867년 31세의 나이에 미국에 3년간 수행원 자격으로 머물 수 있었고, 구미사절단으로 미국와 유럽을 9개월간 시찰하는 기회를 가졌으며, 이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개최된 1973년 만국박람회에 참가해, 이 곳에서 평소 관심 있었던 농업 분야의 대가인 네덜란드의 원예가 다니엘 호이브렌크 Daniel Hooibrenk를 만난다.


 호이브렌크와 함께 반년 간 함께 머물며 신기술을 배우고 일본에 돌아온 그는 <농업삼사>라는 근대적 농법을 다룬 저서를 집필하고 1874년 도쿄 아자부에 가쿠노샤, 즉 농학사를 설립해 서양농법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이 학교는 한 때 도쿄의 4대사립학교로 이름이 높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고, 1882년도에는 전교생이 175명에 달할 정도로 부흥했으나, 기독교 선교사와 외국인 교사들에 대한 양이사상과 전통농학에 대한 숭배사상과 충돌하며, 1884년 정부에 의해 폐교당한다. 1893년 농상무성이 농사시험장을 설립하면서 일본의 전통농학과 서구의 근대농학이 접목되고 일본의 신농학 시기가 펼쳐지지만, 츠다센의 일대기는 당시 메이지유신으로 서양의 과학기술에 가장 친숙했던 일본에서조차, 서양의 과학기술이 전통사회의 반발이라는 거센 저항에 직면해야 했다는 시대적 배경을 드러낸다.



안종수의 <농정신편>과 근대농학자의 어이없는 죽음

 안종수는 1881년 동래부 암행어사 자격으로 일본에 파견된 신사유람단을 수행해 일본에 다녀왔다. 당시 안종수와 함께 신사유람단에 참여한 인물 중에는 훗날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윤치호와 <서유견문>의 저자 유길준도 끼어 있었다. 그는 원래 양반으로 농업과는 크게 상관 없는 인물이었는데, 일본에서 만난 츠다센에게 깊이 감화되어 그의 저서 <농업삼사>를 참고해 귀국 후 단 5개월만에 <농정신편>을 편찬한다. 당시 비밀리에 일본에 다녀온 개화파의 일원들은 이 책에 큰 관심을 가졌다. 1885년 출판되는 이 책의 서문은 갑신정변에 이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으로 참여했던 신기선이 썼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이 책의 역사적 가치를 평가했다.


“이 책이 비록 시행할 수 없는 데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오직 나의 도를 실천한 연후에는 이 책이 통용될 것이다. 이 책이 통행되면 나머지도 널리 통행할 수 있음을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이니, 안종수가 이 책을 편찬함으로써 장차 시행할 조짐이 보이는 것이다.”


 즉, 개화파는 일단 안종수의 책을 시작으로 서양 과학기술에 관한 책들을 대량으로 보급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처음에는 한문과 삽화가 곁들여져 1885년 최초의 근대식 출판사였던 광인사에서 근대식 인쇄기와 납활자를 이용해 출판되었고, 이후 1905년 박문사에서 다시 인쇄되었다가 1931년에는 한글로 번역될 정도로 훌륭한 책이었다. 이 책에는 단지 작물을 기르는 방법 뿐만이 아니라, 당시 서양에서 발달했던 식물생리학의 기본적인 해설이 들어있었고, 화학용어인 소다, 석회, 마그네슘, 산화철, 유산, 인산, 규산 등의 용어가 등장한다. <농정신편>은 조선에 가장 필요한 서양의 과학기술 중 한 가지인 농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개화파의 가장 중요한 저작 중 하나였다.


 안종수는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전국에서 궐기한 의병들에 의해 나주에서 친일파로 지목되어 살해당한다. 그의 나이 36세의 일이었다. 츠다센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농업에 대해 잘 몰랐던 안종수는 그에게 농학을 배워왔지만, 원래 농업에 관심이 많았던 통역사 이수정은 츠다센을 만나 한자로 된 성경책을 조선에 가지고 돌아와 미국인 선교사와 일본인 목사를 찾아 기독교인이 된다. 당시의 일본과 조선은 개화와 전통이 공존하던 사회였다. 그런 혼란기에 근대적 농업을 도입하려던 츠다센과 안종수는 모두 전통을 거부하는 세력으로 낙인 찍혀, 정부에 의해 탄압받고 의병에 의해 살해당했다. 신기선은 <농정신편>의 서문에서 도덕형이상학에 매몰된 조선 선비들의 고루함을 이렇게 비판했다. 안종수의 책이 조선말을 장식한 ‘동도서기론’의 시작을 알린 셈이다.


“차라리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 굶어 죽을지언정 어찌 배부르고 따뜻한 것에 눈이 팔려 이방(異邦)의 법을 모방하겠는가? ......(중략)...... 아! 이는 도(道) 와 기(器)의 구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대개 중국 사람들은 형이상학(形而上學)에 밝은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도는 천하에 홀로 존귀하다. (반면에) 서양 사람들은 형이하학(形而下學)에 밝은 사람들이므로 그 기가천하에상대할자없다. 중국의 도를 가지고 서양의 기를 받아 시행한다면 지구 위의 오대주(五大洲)는 평정할 거리도 못된다.”



종두법의 정치학과 보이지 않는 근대화


 “근대적 정신을 통해 우리가 계몽되고 성숙한 것인가? 아니면 꾸며진 ‘진실’을 통해 우리가 ‘근대’를 세뇌당한 것인가? 우두법의 승리를 극화하고, 더 나아가 그 사례를 과학 일반으로 확대하고, 궁극적으로는 그것의 원천인 그릇된 권력까지를 미화하는 논리와 방식을 생각하면 ‘근대’란 정말로 끔찍한 괴물이다. 그 수선스러움과 반복이 얼마나 지겨운 것인지!” 신동원의 논문 <한국 우두법의 정치학 - 계몽된 근대인가 ‘근대’의 ‘계몽’인가> 중에서


 안종수의 책을 가장 열렬하게 지지한 인물은 개화파의 정치인과 관료가 아니라 종두법을 보급한 지석영이었다. 지석영은 1882년 고종에게 ‘시무소’라는 이름의 상소를 올려 서양의 과학기술에 관한 서적을 수집하고 각종 기계를 수입해 전국의 관원들이 이를 익히게 할 것을 주장했는데, 서양 과학기술자들의 저술인 <만국공법(萬國公法)>, <조선책략(朝鮮策略)>, <보법전기(普法戰紀)>, <박물신편(博物新編)>, <격물입문(格物入門)>, <격치휘편(格致彙編)>을 추천한 뒤에 안종수의 <농정신편>을 소개하고 있다. 고종은 이 상소를 읽고, 의정부에 이를 시행하게 했다.

 
 흔히 종두법의 아버지로만 알려진 지석영은 개화파의 일원으로 서양과학기술에 큰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지석영은 1855년 가난한 양반 가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한의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의학은 중인층의 직업이라는 이유로 의업에 종사하지 않았다. 지석영은 당시 유명한 한의였던 박영선의 문하에서 한학과 의학을 수학한다. 이후 박영선이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가져온 종두법에 관한 책을 읽은 그는, 1879년 창궐한 천연두를 보고 종두법을 배우기 위해 부산의 일본병원인 제생의원에서 종두법을 배워오게 된다.

 
 하지만 종두법을 시행하기 위해선 우두균을 배양할 기술이 필요했고, 종두법을 지지하던 개화파의 지원 아래 그는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방문해 겨우 1개월의 체류기간 동안 우두균 제조법을 완벽하게 익혀, 조선에 종두장을 세우고 천연두 백신 접종을 시작한다. 하지만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면서 평소 종두장에 불만이 많았던 무당들과 위정척사파들에 의해 종두장은 파괴된다. 개화파라는 이유로 죄인이 된 지석영은 유배를 떠나야 했고, 1891년이 되어서야 고종에 의해 석방되었으나, 그의 석방은 고종과 수구파 사이 첨예한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유배지에서 지석영은 서양의학에 근거해 쓰여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의학서인 <신학서설>을 저술한다.


 <신학서설>은 일종의 근대적 보건위생학 저술이다. 그는 조선사람들이 평소 위생과 질병예방에 노력하지 않고 발병 후에 의사를 찾는 일을 반복한다고 지적하며, 햇빛, 열, 공기, 지기 및 온도, 음식, 운동 등의 장을 통해 위생과 질병예방의 원리를 친절하게 설명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학에 근거한 보건위생학 저술일 뿐 아니라, 순국문으로 쓰여 누구나 읽을 수 있었다. 지석영은 부산 제생의원에서 일본인 의사에게 종두법을 배울때, 일본인 교육을 위한 한글교육서를 감수해주었는데, 당시 한글번역서를 다루면서 한글에 대한 관심이 싹텄다고 한다. 지석영이 한글 보급의 선구자로 거론되는건 바로 이런 그의 노력과 이후 지속된 한글에 대한 저술 때문이다.


 이후 복권된 그는 갑오개혁에서 제정된 종두규칙을 보급하는데 힘썼으나, 아관파천으로 인해 다시금 개화파로 몰렸다가 이후 1899년 설립된 의학교의 초대교장으로 의학 교육에 힘썼다. 관립의학교 교장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한글 보급에 힘을 기울이다가, 주시경 등과 함께 한글 표기법을 정립했으며, 한일병합이 이루어진 1910년 이후에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유유당이라는 소아진료소를 차려 아이들의 건강을 돌보았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읽었다는 사실로 친일 논란에 휩쌓여 있으나, 이후 이재명 의사와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는 현재 친일 혐의로 과학기술의 전당 헌정에서도 제외된 상태다.



강요된 과학기술과 전통의 저항, 계몽의 정치학

 
 “원을 하나 설치하고 이상의 책들을 수집하는 동시에 또한 근래 각국에서 사용하는 수차/농기계/직조기/발동기/무기 같은 물건들을 사다가 쌓아 놓고, 이어 각 도에 공문을 띄우도록 하교하여 매개 고을에서 학문 명망이 남달리 뛰어난 사람들 중 유생과 관리를 각각 1명씩 선발하여 이 원에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이 책들을 보게 하고 그 기계를 다루어 보게 할 것입니다.” 1882년 지석영이 고종에게 보낸 시무소 중에서


 의학사가 신동원은 2000년 <한국 우두법의 정치학 - 계몽된 근대인가 ‘근대’의 ‘계몽’인가>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다. 그는 이 논문에서 서양 과학기술 도입의 상징이 되어버린 우두법의 무대를 재검토하며, 지석영의 역할에 의문을 표한다. 그는 “당시 우두법에 반대한 사람들의 논리에도 경청할만한 점이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도 제기하며 당시 조선사회에 우두법이 널리 퍼지지 못했던 현실을 추적한다. 그는 당시 일제가 지석영을 영웅시한 이유가 ““일본인에게서 우두법을 학습해서 온갖 무지와 저항을 이겨내면서 우두법 보급에 힘을 쓴” 지석영의 삶에는 비과학적 사고가 판을 치던 조선 사회, 무능한 정부와 그것을 구원한 과학문명국 일본의 선정을 끌어낼 수 있는 극적인 소재가 담겨 있었”기 때문임을 밝혀낸다.

 
 신동원은 논문에서 지나치게 비싼 접종비용이 우두 접종의 보급을 가로막는 한 원인이었음을 밝혀낸다. 그는 당시 우두법에 극렬하게 반대하던 무녀와 전통 한의학자들의 눈에 보인 우두법은 “조선의 아이를 죽이는 사악한 마술”로 파악될 수 밖에 없었고, 이들이 퍼뜨린 “서양인이 조선 아이를 잡아먹는다는 유언비어” 또한 “시시각각으로 침투되어 들어오는 서양세력”에 대한 저항의 일부라고 해석한다. 즉, 우두법은 “조선말의 위기의식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으며, 이를 단지 “무지와 맥목으로만 비판하는 것은 일방적인 해석”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는 당시 일제가 헌병과 경찰을 동원해 우두접종에 나선 폭력적 계몽의 상황을 조명한다. 그는 “역병의 예방과 건강의 향상이라는 목적의 이면에는 피식민자 개개인에 대한 반폭력적 통치행위가 짙게 배어 있었”으며, 조선 민중은 바로 이런 무단적 행위에 반감을 품었고, 그 반감은 우두법과 같은 근대문물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후 그는 당시 무당들이 굿을 통해 살려낼 수 있었던 두창에 걸린 영아의 비율이 80퍼센트에 달했음을 지적한다. 두창 환자의 치명율이 20퍼센트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조선의 민중과 무당의 시각으로 볼 때, 굿은 두창을 치료하는 효과적인 치료법이었음에 틀림 없다. 그는 이런 논리를 통해 임오군란으로 종두장을 불태운 무당과 한의들의 행위를 변호한다. 당시 민중은 과학적 세계관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고, 그들의 입장에서 우두법에 대한 반발은 나름 합리적 행위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행위는 서양세력의 침략에 대한 저항의 일종이기도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만약 조선이 망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비료와 백신, 친일과 개화의 사이에서


 일제가 근대적 위생개념을 식민지 조선에 강요하며, 민중의 반발을 가져왔다는 신동원의 역사해석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제라는 국가적 수준의 조직에 의해 강요된 정책을, 지석영이라는 일개 개인과 연관시켜 그의 업적을 폄하하는 역사적 해석엔 문제가 있다. 신동원의 논문과 저술이 등장하는 2000년대 초반은 지석영의 친일행적이 논란이 되던 시기와 겹친다. 그가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읽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분명하다. 문제는 한 인물의 생애를 지나치게 단선적으로 취급하려는 이념적 재판에 가까운 학자들의 취향에 있다. 지석영은 친일파인가. 이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한 인간의 인생은 총체적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신동원은 이렇게 말한다.

 
 ““서울에 지석영이라는 자가 있어 (역관의 집안이다) 어려서부터 시를 배워 서화를 알고 일본에 건너가 우두를 배워 1879년, 1880년간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지방을 순방하면서 우두를 가르치더니 점차 전국에 퍼지게 되었다.” 나는 이런 정도의 해석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그렇지만 오직 지석영의 활동 때문에 조선에 우두법이 정착되었다는 식의 해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신동원의 말에 답이 있다. 우리는 그 정도의 해석에서 지석영을 바라봐야 한다. 또한 당시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근대과학기술을 빠르게 도입해 민중의 삶을 풍요롭게 하려던 인물이 역관의 자식이었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서양의 과학기술을 책으로만 읽고 도덕형이상학으로 파악했던 최한기 사후 반세기가 지나서야, 조선에서도 안종수나 지석영처럼 과학기술을 실천의 측면에서 파악한 인물들이 탄생한다. 우리는 바로 그런 맥락에서 지석영의 삶을 이해해야 한다. 그는 한의사로 훈련받았으나, 서양의학의 우수성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자신의 전문분야를 넘어 다양한 과학기술분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넘어, 민중의 언어인 한글을 보급하는데 힘썼다. 어쩌면 그는 망해가던 조선에 나타난 르네상스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업적은 임오군란의 분노한 민중들에게 파괴당했고, 조선말의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적 상황마다 그는 희생양으로 마녀재판을 당했다. 그런 인물이 이완용이나 최남선 같은 노골적인 친일파가 되지 않은 이유가, 나는 더 궁금하다. 한걸음 떨어져 그의 삶을 바라봐도 느껴지는 억울함을, 추도사 낭독이라는 한 사건으로 매도하는 행위가 과연 상식적인지, 한번쯤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의 권력층과 문과적 지식인들이 무능하게 나라를 빼앗기고 있을 때, 안종수와 지석영은 서양의 과학기술 중 조선에 가장 필요했던 농학과 의학을 들여와 망해가던 나라를 어떻게든 살리려 애썼다. 식민지 시기, 망한 나라 조선에서 다시 근대화의 싹이 튼 것도, 바로 그렇게 보이지 않는 근대화를 이루려 애쓴 한국 과학기술자의 원형이 될 인물들 덕분이었다. 우리는 근대사를 과학기술이라는 창을 통해 다시 한번 바라봐야 한다. 미중패권경쟁의 시대, 다시한번 한반도의 미래가 불확실해진 지금은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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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우재 교수
- 중국 하얼빈 공과대학교 생명과학센터 조교수
- 포항공과대학교 생명과학과 박사
- 저서 <플라이 룸>, <선택된 자연> 등
- 동아사이언스, 한겨레 등 다수 매체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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