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채소만을 보호식품으로 삼는 민족들은 작은 신장, 상대적으로 짧은 수명, 높은 영야사망률, 그리고 조상들에게 전수받은 단순한 기계적 발명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우유를 풍부하게 사용하는 민족들은 큰 신장, 긴 수명을 누리며 어린 세대를 더 잘 키운다. 그들은 우유를 사용하지 않는 민족에 비해서 더 공격적이며, 문학, 과학, 예술에서 더 훌륭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또한 그들은 더 수준 높은 교육, 정치체제를 갖추고 있어, 이는 개인들의 능력을 신장시키는 최고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런 성과들은 생리학적 기초를 가지며, 이는 영양과 근본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부정할 길이 없다.” 미국 생화학자 맥컬럼 McCollum의 글을 일본 학자 모리모토 코키치가 번역한 내용 중에서. |
올림픽이 끝났다. 코로나19 시대에 열린 올림픽으로 많은 구설수에 올랐지만, 일본은 미국과 중국에 이어 종합순위 3위라는 쾌거를 거두며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올림픽 순위가 반드시 국력을 상징하지는 않지만, 근대국가의 성립 이후 올림픽의 성적은 한 국가의 성취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특히 서구의 근대국가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던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국민의 위생과 영양이라는 화두는 국가적 아젠다로 작동했고, 이는 현대 일본 국민들의 생활습관을 이해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일본 근대영양학의 탄생과 생리화학
1919년, 조선이 3.1운동으로 식민지로부터 저항을 모색하던 시기에 일본 내무성 위생국은 <각 국에서의 식량문제>라는 자료번역집과 <영양과 식량경제>라는 55쪽짜리 매뉴얼을 발간한다. 1차 세계대전 직후였던 당시 일본에선 쌀 값이 급등하는 ‘쌀 소동’으로 국민적인 소요가 벌어졌고, 식량문제는 일본의 과학자들과 관료들에게 큰 관심거리였다. <영양과 식량경제>를 집필한 두 명의 의학자 나가이 히소무와 사이키 다다스는 일본 근대영양학을 확립시킨 이들이다.
나가이는 책자에서 “석탄을 태우면 증기기관에 열과 힘이 발생하는 것처럼,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은 인간의 몸에서 원기를 만드는 근원이 되는 물질”이라고 단적으로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대부분 당시 독일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생리화학 연구에 기대고 있었는데, 그는 독일의 생리화학자 리비히가 <동물화학> 등에서 주장했던 단백질과 칼로리 이론을 당시 일본의 시대적 환경에 맞춰 전파하고 있었다.
사이키는 1920년 신축된 국립영양연구소의 초대 연구소장이 된 인물이다. 나가이가 과학적 영양원칙을 설파하는데 주력했다면, 사이키는 이러한 원칙을 바탕으로 국민들이 조리법과 식사 방법 등에서 자발적인 노력을 이루어야 한다고 요청했다. 사이키는 재료의 선택에 유의하고, 재료의 낭비를 막을 것이며, 잘 씹고, 다양한 음식물을 섭취하고, 포식하지 않아도 되며, 나아가 수입쌀의 구입도 고려하라는 내용의 조언을 책자에 담았다. 그는 가격 및 영양 매트릭스를 만들어 소고기보다는 닭, 돼지, 말고기 순으로 더욱 경제적이며, 쌀보다는 잡곡이 더 낫고, 영양학적으로 가격이 훨씬 저렴한 수입쌀을 구입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국민을 설득했다.
사이키가 초대 연구소장으로 취임한 국립영양연구소의 설립은, 당시 근대과학으로 성립 중이던 생리화학과 영양학이, 단지 인체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국가 경제와 국민 건강이라는 목표와 결합되던 국민국가의 시대흐름을 보여준다. 국가가 중심이 되어 근대국가로의 이행을 추구하던 당시 일본에서, 과학은 이 모든 국가적 아젠다에 합리성을 제공하는 기준으로 작동했다. 근대화된 국민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국가는 반드시 실험 및 통계조사를 기반으로 하는 과학적 영양 연구를 제도화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국민들의 식생활에 대한 조언에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비타민, 칼로리 등의 과학용어가 일상어로 침투했다.
이와 더불어 문부성은 산하에 ‘생활개선동맹회’를 조직해 “생활”과 “개조”라는 두 키워드로 일본 전역에서 생활개선운동을 펼쳐나갔다. 생활개선운동의 주요 표어는 “문화생활”이었는데, 이는 “간소하고, 합리적이며 효율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경우 서구화된 생활양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쌀 소동으로 촉발된 식량문제에 대한 관료와 과학자들의 관심은 국민국가 일본이라는 맥락 속에서 생활습관 전반에 대한 과학적 합리성의 요구로 변화되어 간 셈이다. 근대국가 일본에서, 의학은 경제학과 접목되었으며 현재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인 칼로리, 단백질,탄수화물과 같은 용어의 범용화도 시작되었다.
위생국가의 발견
과학적 발견이 사회적 변화에 영향을 크게 미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과학은 우리의 인식체계에 분명 변화를 가져오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자역학이나 상대성 이론을 몰라도 일상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하지만 과학적 발견이 당시 사회가 고민하던 문제에 결정적인 해결책을 제공해 줄 경우가 있다. 영양학의 발전이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독일의 과학자 리비히는 주로 투입된 음식 섭취가 어떻게 일과 열로 전환되는지에 관심을 두었다. 신체가 지닌 효율성에 대한 화학적 연구가 영양학으로 급속하게 자리잡는데에는, 당시 근대 국민국가가 고민하던 문제, 즉 강력한 군대와 생산적인 노동력의 양산이라는 이해가 놓여 있었다. 인간의 신체적 효율성 및 통제를 극대화하려던 국민국가의 공장과 군대에게, 근대 생리화학의 영양학 지식은 매력적인 주제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본 근대영양학의 발달 역시, 바로 정확히 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미쉘 푸코는 이런 문제를 ‘근대 생체권력’의 탄생으로 설명한 철학자다. 그는 유럽에서 “17세기를 기점으로 한 집단의 생물학적 존재가 정치적으로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고 주장했으며, 근대 이전 권력이 단지 신체를 착취하던 방식이 근대 이후 생명을 관리, 최적화, 증식시키는 방식으로 변화되었다고 말한다. 근대 국민국가들은 더 생산적이고 건강한 집단을 양산하기 위해 과학기술을 최대한 활용했으며, 이러한 맥락 속에서 공공보건, 산업보건, 주택개량, 산아제한, 영아사망률 조사 등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메이지 일본에서 생물정치는 ‘위생’이라는 개념으로 가장 먼저 등장했다. 메이지 유신 직후 구미에 파견된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의학자 나가요 센사이는 독일어 ‘Gesundheitpflege’을 발견하고 이를 일본어 에이세이 (えいせい), 즉 위생으로 번역했다. 1883년 5월엔 일본 최초의 비정부기구인 일본사립위생회가 탄생한다. 이 단체는 위생개혁운동을 주도했는데, ‘일본 국민의 건강과 삶을 보존하고 향상시키기 위한 방법을 토론하고 연구하며, 위생 지식을 대중화하고 위생 행정을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 단체의 주도로 두창예방접종이 대대적으로 실시되었으며, 위생개혁운동은 메이지 개혁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일본사립위생회는 당시 메이지정부가 추구했던 위생을 통한 근대화의 방향을 명확히 보여준다. 서구 근대국가의 형성과정에서 철저히 배우고, 이들로부터 장점만을 취하려던 메이지정부의 전략 속에서, 파스퇴르와 코흐로 대변되는 세균학의 발전과 과학적 위생론은 근대국가 일본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로 파악되었던 것이다. 일본사립위생회는 1883년 코흐와 함께 세균학 연구를 수행했던 키타사토 쉬바사부로를 초대 연구소장으로 전염병연구소를 설립한다. 그리고 이 연구소를 설립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인물이 바로 후쿠자와 유치키였다. 일본의 위생을 만든 인물인 나가요 센사이와 후쿠자와는 ‘오가타쥬구’라는 난학숙에서 함께 난학을 배운 동문이었기 때문이다. 난학은 이렇게 일본의 근대국가 성립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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