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궁리열과 일본의 과학

  • 강혁 기자
  • 발행 2021-06-17 09:56

일본의 과학기술발전은 150년이라는 축적의 시간으로 가능했다


”일본은 개국 이전에 이미 뛰어난 과학기술 수용의 바탕을 마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근대화에 가장 먼저 성공할 수 있었고, 중국이나 한국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굴욕적인 최근세사를 경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19세기 이전에 이미 동아시아 세나라의 장래를 상당히 예측될 수 있었던 상황었다고도 함직하다. 1800년이라는 시점에서 한・중・일 세 나라의 서양과학에 대한 잠재력을 비교해 본다면, 그 수준은 일본이 제일 높았고, 그 다음이 중국, 그리고 한국이 제일 낮은 위치에 있었다. 이 잠재력의 차이가 그 후의 역사에 크게 작용한 것은 분명하다.” 박성래



후쿠자와 유키치의 <훈몽궁리도해>와 ‘궁리열窮理熱’

1868년 후쿠자와 유키치는 <훈몽궁리도해>라는 책을 출판한다. 현대어로 번역하면 <도해 물리 입문> 정도가 될 이 책은, 물리학 입문서였다. 이 책을 출판하기 2년전 막부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과 일본을 두루 살피고 쓴 책 <서양사정>이 15만부가 팔리며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었지만, <훈몽궁리도해>의 인기는 <서양사정>을 능가했다. 당시 의학과 화학이 서양과학의 주류로 받아들여지던 일본에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이 책은 일본열도 전체를 물리학 열풍에 빠져들게 했다. 유키치의 책은 ‘궁리열窮理熱’이라 불리는 출판붐을 일으키는데, 너도나도 물리학 입문서를 펴내는 것은 물론, 책의 제목에 ‘궁리’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이 유행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메이지 정부가 ‘물리’를 공식명칭으로 확정하자 <물리요용>을 썼고, 그의 아들을 MIT의 물리학과에 입학시켰다.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서양학문의 최정점은 물리학이었다.

근대 전환기 일본과 조선엔 모두 ‘실학’이라 불릴만한 학문의 전통이 내재하고 있었다. 두 국가의 지식인들 중 근대라는 전환기를 인식하고 이를 준비했던 이들은 대부분 실학이라는 학문적 틀을 통해 서양학문을 받아들였고, 또한 국가의 혁신을 꾀했다. 하지만 일본과 한국의 실학이 나아간 방향은 정반대였다. 사사키 슌스케와 카타오카 류가 쓴 논문 <일본과 한국에서의 ‘실학’의 근대화>엔 일본 실학의 근대화를 이끌었던 후쿠오카 유키치와 한국의 이능화에 대한 비교가 실려있다. 일본과 한국의 실학이 다다른 상반된 결론을, 그들은 이렇게 요약한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종래의 동아시아적 세계관과 결별하고 서양의 과학사상에서 태어난 기계론적 세계관에 기초하였다. 한편 이능화는 동아시아에서의 ‘실학’의 고증학적·절충학적 태도를 계승하면서 새롭게 접촉한 서양문명을 의미지었다고 할 수 있다.”


근대 전환기 일본에서 실학이라는 개념은 ‘사이언스’와 같은 의미였다. 즉, 후쿠오카 유키치를 비롯한 일본 근대 지식인들에게 실학은 넓은 의미의 과학, 즉 서양학이었다. 특히 유키치를 비롯한 일본의 근대적 지식인들은 동아시아적 세계관과의 결별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당시 서양과학의 주류였던 기계론적 세계관까지 껴안았다. 그들에게 사이언스란 자연과학 뿐 아니라 사회과학이나 인문학까지 포함하는 학문 전체를 의미했고, 그 모델은 물리학이었다. 즉 일본의 근대 실학자들은 자연과학의 방법론 뿐 아니라, 그 세계관까지를 모두 받아들였던 것이다.



일본에 정착한 확실성 추구의 시대정신


후쿠자와가 받아들인 서양의 과학적 세계관은 흔히 데카르트에서 유래한 기계론적 자연관이라고 불린다. 즉, 자연은 인간에 의해 조작되기만 하는 대상이며, 조작의 원칙은 물리학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17세기 과학혁명의 시기에 서양이 ‘확실성 추구의 시대정신’을 추구했던건 사실이지만, 그 세계관을 단순한 기계론적 세계관이라고 부르는건 상황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취급하는 일이 될 것이다.

당시 유럽에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교황의 권력이 각 지역 정부의 군주들에게 분산되면서, 군주의 독재성이 강화되는 일이 벌어졌고 정치, 종교, 학문에서의 방법론은 하나의 통일된 관점 속에서 군주의 통치에 봉사해야만 했다. 당시 뉴턴역학이 유럽 전역에 퍼질 수 있었던건, 뉴턴역학이 우주가 자비로운 창조주에 의해 설계된 우주 법칙에 따라 안정되어 있다는 믿음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뉴턴 자신이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신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건 우연이 아니라는 뜻이다.

17세기 이후 유럽은 ‘확실성 추구의 시대’라는 세계관의 변화를 경험한다. 당시 성립된 베스트팔렌 지식체계는 ‘지식의 절대적 순서와 공리체계에 바탕을 둔 연역적 방법론의 우위성’, ‘예측 가능성의 보편성’, ‘비맥락적 보편성’이라는 특징으로 정의할 수 있다. 즉, 후쿠자와가 받아들인 과학적 세계관은 17세기 이후 18세기까지 유럽을 뒤흔들었던 확실성 추구의 시대정신이었던 셈이다. 물리학을 기반으로, 후쿠자와는 모든 학문을 일종의 서열관계로 파악했고, 이는 18세기 유럽 지식인들의 사고방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즉, 일본의 지식 근대화를 이끈 대표적 실학자는 과학적 방법론 뿐 아니라, 과학이 주조한 세계관 또한 받아들였던 것이다.

베스트팔렌의 지식체계가 의미하는건, “확실성을 함축하는 근대의 합리성”이다. 철학자 이상하는 바로 이 베스트팔렌 지식체계의 정착이, “과학과 종교의 분리를 가져온 과학의 세속화 여정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즉, 신에게 부여받은 인간의 이성적 능력만으로도 인간은 신이 설계한 자연의 구조를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고, 그 의미는 더이상 자연학이 신학에 포섭될 이유가 없다는 뜻이 된다.



과학적 세계관을 둘러싼 한국과 일본 실학의 갈림길

후쿠자와가 받아들인 과학적 세계관은 유럽이 1세기 동안 겪은 시대정신의 변화 전체이기도 했다. 그는 바로 이 세계관을 들고 “종래의 동아시아적 세계관과 정면으로 대결하였”으며, 이는 그가 기계론적 세계관을 새로운 ‘문명’으로 수용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후쿠자와가 그리스도교에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그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적 가치 외엔 없다고 생각했다. 즉, 후쿠자와의 세계관 속에서 가장 중요한 체제는 물리학이라는 방법론과 거기서 유도되는 기계론적 세계관이었다.

하지만 후쿠자와보다 한 세대 이전 실학자인 한국의 최한기와 한 세대 이후의 실학자인 이능화를 모두 살펴보아도, 그들이 서양의 세계관적 도전에 대해 보인 응전의 방식은 크게 달랐다. 근대 전환기에 서구 문명의 충격은 한,중,일 모두에 불어닥쳤고, 당대의 지식인 모두가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던건 사실이다. 최한기 또한 ‘기학’이라는 학문체계를 만들며 주자학과 실학적 전통 위에 자신의 서양학문의 이해를 더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하지만 최한기는 실용적인 여러 학문을 체계적으로 종합해 거대한 사상 체계를 구축하는데 집중했다. 반면 일본의 실학자들은 서구의 과학적 방법론과 세계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일본사회에 전달하고, 이를 통해 일본사회를 발전시킬 접점을 찾는 일에 몰두했다.

특히 후쿠자와보다 한세대 늦은 실학자 이능화가, 서양의 근대화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고대 신교에 대한 연구를 통해 서구 기독교를 수용하는 정신적 토양이 이미 조선에 내재되어 있었다는 귀결에 이르렀다는 점은, 서구문명을 현실적으로 직시한 후쿠자와의 인식과 달리, 당시 조선의 낡은 실학자들의 세계인식이 얼마나 안이했었는지를 보여준다. 후쿠자와는 서양의 과학을 수용하고 그리스도교를 배척했고, 다산과 이능화는 과학을 배척하고 그리스도교를 수용했다. 바로 근대전환기 두 국가의 실학자들이 보여주는 이 차이가, 이후 두 국가의 운명을 갈라놓을 이정표가 되었음은 분명한 일이다.

<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 개국에서 노벨상까지 150년의 발자취>라는 책의 첫 장은,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한 에피소드로 쓰였다. 저자 고토 히데키는 후쿠자와가 메이지 시대에 각종 자연과학서적을 출판하는 동시에, 화학, 의학 분야에서도 여러 연구자들에게 기회를 주어 일본 근대과학의 길을 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야말로 150년 후 일본인의 노벨상 연속 수상을 가능케 한 최대 공헌자다”라고 말한다. 한국에서 악명 높기로 유명한 그의 ‘탈아입구론’을 잠시 잊고 근대 전환기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이 서양에 응전한 방법의 차이가 만든 역사적 귀결을 돌아봐야 한다.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두 국가의 운명을 갈랐기 때문이다.


<필자> 김우재 교수
- 중국 하얼빈 공과대학교 생명과학센터 조교수
- 포항공과대학교 생명과학과 박사
- 저서 <플라이 룸>, <선택된 자연> 등
- 동아사이언스, 한겨레 등 다수 매체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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