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네덜란드의 해부학과 일본의 근대

  • 강혁 기자
  • 발행 2021-07-12 10:48

“일본에 오는 선교사는 일본인들이 묻게 될 수많은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학식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선교사는 자연철학자이면 좋을 것입니다. 또 일본인과의 토론에서 이들의 잘못을 지적해낼 수 있는 변증학자라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그 위에다가 우주의 모든 현상에 대해 알고 있는 분이라면 더욱 바람직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은 천체의 운동이나 일식, 달이 차고 기우는 것 등에 대해 열심히 그 이유를 설명들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또 비나 싸락눈, 혜성, 천둥이나 번개 등등 온갖 자연현상의 설명은 민중의 마음을 크게 움직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회 신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1552년 쓴 편지 중에서



난학의 시대와 일본의 변화

1543년 9월, 일본 다네가시마에 상륙한 포르투칼인에게 소총을 구입한 이후, 일본과 서양의 교섭은 불가항력적으로 늘어났다. 이 과정에서 1587년을 기점으로 기독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일어나긴 했지만, 16세기에서 17세기를 거치며 “일본인들의 서양을 향한 창은 언제나 빠끔히 열려 있었다.” 일본의 막부는 기독교를 강력하게 금지했지만, 포르투칼 선교사들로부터 전해진 서양 과학과 의학에 관한 저술들은 민간에 광범위하게 퍼졌다. 특히 17세기 말부터 서양과의 교역이 네덜란드, 즉 화란을 중심으로 변화하면서, 일본의 서양 과학기술 수용은 활기를 띄기 시작한다.

18세기가 되면, 일본엔 네덜란드어를 배운 일본인들이 활발하게 활동을 시작하고, ‘난학蘭学’의 시대가 활짝 열린다. 엄격한 기독교 서적에 대한 금지 속에서, 비교적 쉽게 난학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데에는, 1774년 8월 간행된 서양 해부학 책 <해체신서解體新書>의 번역이라는 사건이 놓여 있다. 1771년부터 화란어를 공부한 젊은 난학자들이 번역하기 시작해 완성한 이 책은 독일의 요한 쿨무스 Johann Kulmus가 지은 해부학서 Anaromische Tabellen(1732)의 네덜란드판 번역서를 일본어로 옮긴 것이다. 서양의 최신 과학서가 불과 40년도 되지 않아 일본에서 번역된 셈이다.

새로운 학문의 형성은 “인식론적인 이유와 정치적인 이유, 사회적인 욕구가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나타난다. 개항기 동아시아에서 학문의 근대화란 서양학문의 수용에 다름 아니었다. 일본은 서양문명을 수용하면서 기독교라는 종교와의 철저한 분리과정을 거쳐 근대학문을 수용한 독특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독특한 서양학문 수용의 역사는, ‘난학’이라는 특수 조건 속에서 파생되어 현대의 일본으로 이어졌다. 특히 비슷한 시기 중국이 천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서양학문의 수용에 집중했던 반면, 일본은 의학과 생물학을 중심으로 서양학문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서양학문에 대한 수요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는데, 중국은 관 주도로, 일본은 민간 주도로 과학기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이후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거대한 변화를 가져오는 기폭제로 작동하게 된다.



<해체신서>와 소그룹의 괴짜들

18세기 일본의 유학자 중 가장 우수한 이들은 유교 경전의 해석보다 서양학문의 도전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특히 오랫동안 기독교를 철저하게 배제하면서 이에 대해 자신감을 지니고 있던 일본 지배층은, 서양과의 무역이라는 불가항력적인 현실 앞에서, 서양학문의 수입에까지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18세기 난학의 시대에, 일본에서 이미 기독교인 자체는 소멸되어 있었고, 바로 그런 맥락 속에서 난학은 기독교를 배제한 서양지식을 총칭하는 단어로 유통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난학은 일본 지배층의 예상을 벗어나, 광범위하게 성행했고, 누구나 난학에 대해 이야기할 정도로 유행하기 시작한다.

<해체신서>의 번역을 주도한 인물은 스기다 겐바구다. 그는 한의학을 전공했지만 기존의 동양의학보다 서양의학에 호기심을 느끼고, 쿨무스의 <해부도감> 번역이라는 무모한 도전을 감행했다. 심지어 그는 네덜란드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오직 <해부도감>에 그려진 해부도만을 보고 번역을 결심한 겐바구 곁으로 마에노 류타쿠, 나카가와 준안 같은 난학자들이 참여하게 되고, 네덜란드-일본어 사전조차 없던 시대에 이들은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 네덜란드어를 배우며 번역을 이어갔다. 이들 중 마에노 류타쿠는 스스로의 별명을 ‘화란 귀신’이라 지을 정도로 난학에 모든걸 바친 괴짜였다.

스기다를 중심으로 모인 일군의 소그룹은 한달에 6~7차례씩 모여 번역작업을 시작했고, 1년 10개월만에 총 249페이지의 번역본을 완성한다. “노와 키도 없이 배를 타고 큰바다에 나온 느낌이었다. 다만 질려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라는 스기다의 회상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의 도전은 지금 생각해도 무모한 모험이었다. 하지만 이 괴짜들의 무모한 도전으로, 동양의학에서 관념적으로 사고하던 인체가 <해체신서>의 번역을 통해 실존하는 대상이 되었고, 이를 통해 일본의 학계는 거대한 지적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1774년 <해체신서>의 4권이 발간되면서 일본의 서양학문 수용은 ‘난학’이라는 이름을 넘어 ‘양학’이라는 이름으로 체계화되기에 이른다.

<해체신서>가 난학의 붐을 가져오자, 이제 난학은 ‘난학숙’이라는 학원을 통해 체계적으로 난학선생들을 길러내는 학풍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난학숙을 졸업한 이들은 막부와 번에서 좋은 직업을 구할 수 있었고, 서양학문을 번역출판하는 일은 국익에 기여하는 사업으로 막부에 공인되었다. 나가사키, 에도를 거쳐 교토와 오사카에 난학붐이 일어났고, 난학을 표방한 난학숙이 수십군데에 생겨났다. 메이지유신이 일어나기 전, 이미 일본 전국엔 난학연구자가 3000명 넘게 포진하고 있었다.



나가사키의 데지마, 일본의 근대를 주조한 작은 섬

스기다가 네덜란드의 해부학을 접할 수 있었던건 당시 나가사키 데지마라는 인공섬에 네덜란드 의사가 상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6세기에 서양과의 교류를 시작했으나 에도막부의 쇄국정책으로 기독교가 철저히 금지되었던 일본에서, 나가사키의 데지마는 서양과의 유일한 교류창구였다. 기독교인을 말살하는 도중에도 데지마를 통한 서양문명과의 교류는 200년 넘게 지속되었고, 네덜란드는 포교 없이 오직 교역만 하겠다는 맹세를 하며 일본 지배층을 유혹했다. 1634년 일본정부는 4300평 정도의 인공섬 데지마를 만들고, 이 곳에서 네덜란드인을 상주시켰다.

데지마의 네덜란드인들은 일본 여성과 결혼하는 등 자유롭게 생활했고, 이후 1855년이 되면 일란화친조약으로 네덜란드인 모두가 나가사키로 자유롭게 출입하게 되면서 데지마의 존재가치는 유명무실해지게 된다. 중국과 조선이 서양과의 교류에서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던 16~18세기의 200년 동안, 일본은 데지마라는 작은 인공섬을 통해 적극적으로 서양의 학문을 받아들였고, 그 학문의 대부분은 과학기술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난학은 일본의 학계에 합리적 사고와 인간평등사상이라는 거대한 사상적 조류를 만들어낸다. 흔히 메이지유신이 일본 과학기술의 원년이라고 여겨지고, 일본의 과학기술역사가 150년이 되었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은 메이지유신 이전부터 일본은 200여년 동안 난학의 시대라는 과도기를 거치며 근대화를 준비하고 있었던 셈이다. 19세기 일본의 부흥은 200여년의 축적의 시간이 잉태한 결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 김우재 교수
- 중국 하얼빈 공과대학교 생명과학센터 조교수
- 포항공과대학교 생명과학과 박사
- 저서 <플라이 룸>, <선택된 자연> 등
- 동아사이언스, 한겨레 등 다수 매체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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