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에서 이번에 일본인이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는지에 관해서 다루겠다고 말하고 나서 크게 후회했다. 이 방대하고 복잡한 이야기를 이 짧은 글에 어떻게 녹여야 할지 막막했다. 무엇보다 과연 일본인이 ‘그렇게’ 전쟁을 기억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충분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을지 글을 써 내려갈수록 자신이 없어졌다. 전쟁의 기억은 부정확하며 단 하나만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기억의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그 화자의 것은 다른 기억과 충돌하게 마련이다. 게다가 전쟁을 기억한다는 것은 실제로 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전후 세대에게는 누군가의 기억을 ‘어떻게’ 이어받을지를 선택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그래서 거기에서 전쟁의 기억은 다시금 파편화되거나 왜곡된다. 전쟁의 기억을 다루려는 필자의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이다.
이렇게 난감해하는 필자에게 그래도 쓸 수 있다고 격려해 준 책이 있어서 먼저 소개하며 시작하고자 한다.
전쟁을 기억한다
후지와라 기이치 도쿄대 교수가 쓴 <戦争を記憶する(전쟁을 기억한다)>(2001)이다. 이 책은 2003년에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는데 조금 오래되었지만 저자의 메시지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필자는 이 책을 일본 유학을 떠나기 전에 읽었는데 2000년대 중반에 접어들던 시기는 한일은 물론 북일 사이에도 ‘큰일’이 발생해서 몹시 시끄러웠던 때였다. 그런데 “일본 국민이 그 전쟁을 피해자로서 기억하고 있다고?” 지난 식민지 지배와 전쟁의 가해자로서 그 기억 또한 당연히 전쟁을 반성의 대상으로서 부끄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당시의 필자에게는 작지 않은 충격이었다. 좀 길지만 후지와라 교수의 설명을 직접 인용해 본다.
“전쟁책임을 ‘일부의 군부’에게 몰아버리고 이들을 ‘국민’에서 제외해버리는 것으로 ‘국민’은 (전쟁)책임에서 면제된다. 정치적 책임을 지는 것은 전쟁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는 말이지만 자신들도 피해자인 이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도식이 성립될 수 있다.” |
여기에서 ‘일부의 군부’를 제외한 일본 ‘국민’이 피해자가 된다는 근거, 즉 그 국민을 피해자로 만든 것은 침략전쟁을 시작한 가해자로서의 군부나 정부가 아니다. 원폭투하와 공습으로 그 국민에게 직접 피해를 준 미국도 가해자로 기억하지 않는다. 후술하겠지만, 어찌 보면 독특한 이러한 피해자의 기억은 전후 일본의 반전(反戰)사상을 낳았고 거기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은 모호하거나 무의미하다. 아니, 그보다는 사라진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물론 후지와라 교수의 논지는 그러한 피해자로서의 기억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의 기억도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의 의도는 일본인이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가 아니라 전쟁의 기억과 관련한 여러 논점을 제시하고 특히 전쟁에 대한 ‘국민의 기억’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있다. 이 책은 전쟁의 기억에 관한 거의 모든 쟁점을 망라하고 있는데, 이 칼럼에서 다 다룰 수는 없기에 그중 한국인이나 미국인의 기억과 가장 날카롭게 부딪치는 ‘피해자의 기억’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 것이다.
히로시마, 그리고 하나의 의문
히로시마는 일본인에게는 반전사상의 원점이자 피해자의 기억이 시작되는 ‘것’이다. 2016년 5월, 당시 오바마 미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이 미국과 일본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물론 그 초점은 오바마 대통령이 원폭 투하에 대해서 ‘사과’를 할지에 모아졌다. 결과적으로 사과 대신 ‘모든’ 희생자에 대해서 추도하는 것으로 끝났다. 일본인의 반응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시 일본 미디어의 보도를 보면 미국인의 기억에 대한 배려 때문인지 ‘그 정도면 됐다’ 정도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그만큼 히로시마는 그 전쟁에 대한 양측의 기억이 첨예하게 충돌하는 지점에 있다. 히로시마에서 전쟁에 대한 두 개의 기억의 끝과 시작이 만나기 때문이다. 하나의 기억은 많은 희생을 멈추는, 전쟁을 끝내는 승리의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핵무기의 위험성을 알리고 또 다른 전쟁의 시작을 막는 패배의 기억이다.
일본에 살면서 매년 8월 15일 즈음이 되면 복잡한 심경으로 TV를 보게 된다. 한국에서는 광복절이지만 일본에서는 종전기념일로서 ‘전몰자를 추도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날’로 정해져 있다. 복잡한 심경이 되는 이유는 세계에서 유일무이 원폭 피해지인 ‘히로시마’ 때문이다. 필자가 자주 보았던 TBS에서는 매년 그즈음이 되면 히로시마를 기억하는 다큐 형식의 특집방송을 내보낸다. 일본인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아야세 하루카(綾瀬はるか)라는 히로시마 출신 여배우가 원폭 피해자나 유가족을 인터뷰하기도 하고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원폭 피해의 아픔과 함께 평화와 반전 메시지를 전한다.
그런데 그 여배우의 내레이션이 당시 필자에게는 ‘일본인은 전쟁의 피해자’라는 메시지로 들리면서 불편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원폭투하와 공습으로 일본 국민이 큰 피해를 본 것은 맞다. 그 피해가 컸기에 반전과 평화를 외치는 것도 맞다. 특히 바깥의 시선이 아닌 안쪽의 시선으로 옮겨가면 더욱 공감이 간다. 그런데 왜 불편할까? 이러한 불편함은 필자도 즐겨 찾아보는 애니메이션 영화에서도 자주 경험한다.
<이 세상의 한구석에(この世界の片隅に)>(2016)
현재 일본인이 그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가장 잘 묘사한 작품이 아닐까 한다. 일본에서는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할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고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대상을 수상해서인지 한국에서도 큰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영화로서의 작품성과는 별개로 한국인에게는 다소 불편한 영화일 수 있다.
줄거리는 대략 이러하다. 1944년, 히로시마에 사는 18세 소녀 스즈가 같은 현내 구레라는 군항 도시로 시집을 간다. 전시하에서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스즈는 밝은 성격으로 힘든 일상을 극복해 갔지만 이듬해에 공습과 원폭투하로 소중한 것들을 잃고 종전을 맞는다. 그래도 스즈는 그 폐허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그런데 무엇이 한국인에게 불편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일까? 그 전쟁에 대한 한국인의 기억은 미국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원폭투하 자체의 도덕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그것이 가져온 결과, 이를테면 원폭투하가 전쟁의 종결을 이끌었고 그것이 오히려 더 있을 수많은 희생을 막았다, 그로 인해 한국처럼 많은 아시아 국가가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요컨대 한국인에게 원폭 투하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침략에 의한 피해자로서의 기억과 함께 그것을 물리친 승리의 전쟁으로 기억되고 있다. 게다가 전쟁의 개시와 전개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일반 국민들도 방관자로서 폭력의 주체인 국가와 동일시하는데 이것은 전쟁책임의 주체를 ‘일본인’으로 본다는 것과 같다.
따라서 영화에서 스즈의 경험은 개인의 기억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한국인 관객에게는 국민이나 국가의 기억으로 보여지게 된다. 그렇기에 일본 국민 개개인을 전쟁의 피해자로 묘사하는 것은 도리어 침략에 대해서 ‘정당한’ 전쟁을 수행했다고 기억하는 피해자(승리자)를 가해자로 보이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필자가 지나치게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본 것일 수도 있다. 다만 누군가 이 영화를 보고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은 아마도 일본 국민 개개인도 전쟁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기억’하거나 누군가로부터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불편한 ‘반전’사상
히로시마가 피해자의 기억으로, 그리고 그것이 반전사상으로 이어지는 논리적 과정은 결국 전쟁 자체를 ‘절대악’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후지와라 교수의 말을 인용해 본다. “전쟁을 절대악이라고 할 경우 옳고 그름은 전쟁을 누가 일으켰느냐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그 자체가 나쁘기 때문에 전쟁 주체에 따라서 전쟁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이것이 히로시마, 그리고 그 전쟁에 대한 기억이 가져다준 반전사상의 논리이다.
그렇다면 일본인은 어떻게 전쟁을 절대악으로 인식하게 되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전후 일본에서 그 전쟁을 주로 국가나 국민의 경험이 아닌 참전하지 않은 개인의 경험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비전투원인 개인의 경험은 피해의 경험이고 그러한 피해를 입힌 주체는 전쟁 자체가 된다. 비전투원인 개인과 전후 세대에게 직접적인 전쟁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이라면, 가해자와 피해자 또는 침략자와 방어자를 구분하지 않고 절대악인 전쟁 자체에 반대한다는 전후 일본의 반전사상에 대해서 비판하기 어려워진다. 히로시마가 상징하는 평화와 반전의 메시지를 한국인인 필자가 답답하고 불편하게 느낀 것은 그 때문이었다.
다시 앞에서 소개한 애니메이션 영화로 돌아가 보자. 이 영화는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말하지 않고 자신들‘은’ 피해자라고 그리고 있다. ‘나’의 이야기이기에 ‘타인’의 피해까지 다룰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피해자의 기억과 전후 일본의 반전사상이 타인의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실제로 일본에서 그러한 필요성을 느끼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타인의 피해도 개인의 이야기에 포함시키거나 피해자로서의 기억에 폭력의 주체인 군부와 위정자를 포함시키는 기억의 행위가 필요하지 않을까?
패전을 알리는 ‘옥음방송’을 들은 스즈는 흐느끼며 이렇게 외친다. “그러니까 폭력에 굴복하게 되는 건가?” 이 대사를 여러 번 곱씹어 보았지만 필자로서는 그 감정과 의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필자가 경험하지 않은 스즈 개인의 이야기이자 기억일 테니까. 누구의 폭력인지, 누가 굴복한 것인지, 스즈는 분명히 말해주지 않는다.
끝맺을 수 없는 이야기
그럼 전후에 태어난 세대들은 과거의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전후 76년이 흘렀다. 현재 일본 국민들의 대다수는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그 전쟁을 논하고 이야기하는 정치인이나 학자들도 포함된다. 전후 세대들은 전쟁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처럼 전쟁 세대들로부터 받아들이거나 역사처럼 교육과 미디어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당연히 전후 세대들에게 전쟁책임을 물을 수는 없으며 단지 기억하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전해 받거나 배운 전쟁의 기억은 피해자로서의 기억이다. 그래서 타인의 기억과 충돌한다. 이처럼 전쟁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는 도돌이표처럼 되풀이된다. 도저히 끝맺을 수 없는 이야기라면 차라리 ‘잊힌 전쟁’이 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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