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극한 직업 - 한국의 판사

  • 강혁 기자
  • 발행 2022-04-07 11:57

얼마 전 대학 후배인 현직 부장판사 A를 만났다. 재경 모 지방법원에서 형사 사건을 담당하고 있다. A는 아직 50세가 되지도 않았는데, 요즘 오십견으로 팔을 제대로 들 수가 없다고 했다. 직업병이라며, 하루 종일 앉아 기록만 넘기고 있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푸념했다. 그 전에 민사 소액사건의 단독 판사일 때는 워낙 기록을 많이 넘기다 보니 손목에 물혹이 생겨 고생한 적도 있다고 했다. 남들이 보기에 품위 있고 멋져 보이는 ‘판사’라는 직업이, 사실은 극한 직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한국 판사의 현주소가 아닐까 한다.

한국에서 판사라는 직업이 극한 직업이 된 이유는 판사 1인당 담당하여 처리할 사건 수가 다른 외국에 비하여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실태를 한번 살펴 보자.


주요국 판사 업무량 비교(2019년 기준, 단위: 명, 달러)

출처: 2019년 9월23일자 대법원 보도자료. *현재 인원 


위 비교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 판사 1인당 사건 수는 독일의 약 5.17배, 일본의 약 3.05배, 프랑스의 약 2.36배에 이른다. 독일과 같은 수준으로 사건을 담당하여 처리하려면 우리나라 판사 인원수는 15,356명이 되어야 하고, 일본 수준이 되려면 판사 인원수가 9,068명이, 프랑스 수준이 되려면 판사 인원수가 7,004명이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 통계자료만 보더라도 한국 판사들의 업무량이 얼마나 과도한 지를 바로 알 수 있다. 게다가 반복하여 들려오는 판사들의 과로사 소식에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길 없다.

위 통계자료에서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국민들이 사법제도인 법원에 많이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인구수 대비 접수 소송 사건 수를 보아도 독일, 프랑스에 뒤지지 않고, 일본에 대비 인구수가 절반도 되지 않는 한국의 사건 수가 일본의 약 2.3배 가량이나 많은데, 이것은 우리나라 국민들이 법원을 많이 이용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한국 국민들의 권리의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즉, 사법 제도를 활용해서 자기의 권리를 확인 받고자 하는 권리의식이 높다는 점이 법원의 업무를 과중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한국인은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은, 우리의 사법제도 체계가 잘 갖추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아래 통계 자료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세계은행은 매년 세계 각국의 ‘기업환경평가 보고서(Doing Business)’를 발표하는데, 2019년 10월 발표에 따르면, ‘법적분쟁해결’ 항목에서 한국은 세계 2위에 올라 있다(2016년, 2017년은 이 부분 1위 였다). 


‘법적분쟁해결’ 항목 중, 주요 국가의 순위(2019년 10월 발표 기준)

출처: 2019년 10월 24일자 기획재정부 보도자료, 필자 수정.


위 발표 자료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재판 기간은 미국, 독일, 일본 등 선진국에 비하여 상당히 짧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소송 가액 대비 소송비용' 비율 즉, 소송으로 얻는 이익의 몇 %가 비용으로 나가는가를 나타내는 항목에서도 다른 나라에 비하여 저렴함을 알 수 있다. 그 외 사법제도의 여러 절차적인 면에서의 효율성도 다른 나라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위,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소송 하기가 좋은 나라인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우리나라의 소송 건수는 날로 증가하는 추세에 있고, 이는 곧 판사의 업무 부담은 더욱 가중 될 것임을 용이하게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업무 부담은 판사들의 복지 측면에서도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사법제도 자체 혹은 일반 국민들에게도 부작용을 초래할 개연성이 크다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일반 국민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격무에 시달리는 판사들이 자신의 사건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여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없지 않겠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질 것이고, 이는 결국 사법제도 전반에 대한 불신 풍조로 이어질 것이다. 실제 판사들 입장에서도 과부하가 걸린 사건을 처내기에 급급하다 보니, 새로운 법리에 대한 연구 시간의 부족 등으로 재판의 부실화와 보수화 라는 부작용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의 해결안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판사의 증원이다. 그러나 현재의 판사의 정원은 법률(법원조직법, 각급 법원 판사 정원법)로 정하고 있고, 법조 일원화 정책에 맞추면서 적정한 판사의 수로 증원한다는 것은, 예산 문제뿐 아니라 사법부 전체의 구조적 문제와 연관되어 있으므로 곧바로 해결책이 나오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렇다면, 법원에 접수되는 사건을 줄이는 방법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인데, 대체적 분쟁 해결(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 ADR) 제도를 그 대안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ADR 제도는 법정으로 분쟁을 끌고 가기 전에 전문적이고 중립적인 제3자의 관여로 당사자 간에 조금씩 양보하여 원만하게 분쟁을 해결하도록 하는 방식을 말한다. 가장 대표적인 유형에는 중재와 조정이 있다.

'중재'는 당사자가 분쟁을 중재로 해결하기로 합의(중재 합의)하면, 실제 분쟁 발생시 제3자인 전문가를 중재인으로 선정하고, 그 중재인에게 분쟁 해결을 맡기는 제도다. 중재인 판정은 법원 확정판결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따라서 제1심으로 끝난다). 외국기업과의 거래와 관련한 계약서를 체결할 때에 ‘중재 합의’ 조항을 계약서에 포함시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국내 기업 간이나 개인간의 거래 계약에 있어 ‘중재 합의’ 조항을 넣는 경우는 많지 않다(단, 최근에는 건설 등 특정 전문분야에서는 ‘중재 합의’ 조항을 두는 사례가 늘어 나는 것 같다).

한편, '조정'은 중립적 위치에 있는 조정인이 당사자가 협상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도록 도와주는 제도다. 당사자 간 합의가 성립하지 않으면 조정인이 직권으로 조정안을 제시하는데, 당사자 일방이라도 조정안에 이의를 제기하면 조정은 성립되지 않고, 소송이 개시된다. 조정 절차는 법원이 직권으로 사건을 조정으로 넘기는 '조정 회부'와 당사자가 직접 요청하는 '조정 신청'의 방법으로 시작된다. 법원에서 조정을 담당하기도 하지만, 법원이 외부기관에 조정을 위임하기도 한다.

ADR 제도를 담당하는 우리나라 행정기관은 50여 개가 넘는다. 정부 부처에 소속되며 주로 '분쟁조정위원회', '중재위원회' 등의 명칭을 가진 기관이다. 공정거래위원회 산하 한국소비자원의 '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 환경부의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회' 등이 대표적이다. '언론중재위원회', '중앙노동위원회', '한국저작권위원회' 등도 각각 언론과 노동, 저작권 관련 분쟁 해결을 지원한다. 다만, 이와 같은 ADR 제도 담당 기관이 갖추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이러한 곳을 이용하여 분쟁을 해결하는 비율은 저조하다는 것이다. 전국 법원에서 조정 절차를 밟는 사건 중 당사자가 직접 조정을 요청하는 조정 신청 비율은 고작 1%에도 못 미친다.

이와 같이 ADR 제도에 의한 분쟁해결은 아직은 저조한 상황인 것 같은데, 이는 법률 당사자들의 ADR 제도에 대한 인식 부족, 인지도 낮음의 문제도 있겠으나, 쌍방 양보와 타협을 근간으로 하는 ADR 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즉, 권리 의식에 투철하여 법원의 화해 권고도 잘 받아 들이지 않는 우리의 소송 관념 하에서, 사생결단으로 다투고 있는 당사자들에게 ADR 제도는 아직은 근본적 대안이 되기 어려워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에는 미국의 증거개시(Discovery) 제도의 도입을 주장하는 견해가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다.

미국 민사소송법상의 증거개시란 분쟁 당사자들이 서로가 가진 분쟁 관련 정보와 증거를 상대방에게 공개하거나, 제공하여 서로 공유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분쟁 당사자와 판사는 가능한 한 정확하고 많은 정보를 가지게 되고, 이를 근거로 적절하고 원활하게 분쟁해결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미국의 사례에 따르면 1938년에 이러한 증거개시제도를 도입한 이후, 재판을 주관하는 판사들이 자신의 역할을 '수동적 판단자(passive decision maker)'에서 '적극적 관리자(active manager)'로 바꾸었다고 한다. 적극적 관리자로서의 판사들은 소송을 판결에 의하지 않고 당사자들 간의 합의에 의해서 조기에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그 결과 민사소송에서 판결에 의한 분쟁해결의 빈도는 극적으로 감소하게 되었다고 한다(미국 연방민사소송법상 증거개시제도와 판사의 역할, 2013. 변진석).

다시 말해, 모든 증거가 다 공유된 상황에서 판사가 적극적 관리자로서 역할을 한다면, 자기주장이 옳다고 막무가내로 주장하던 당사자들도 판사의 합의 또는 화해 권고에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고, 이러한 법원의 분쟁 해결 의지 및 진행에 따라, 일단 소송부터 걸고 보자는 행태가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미국의 제도를 그대로 도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실정에 맞게 소위 “한국형 증거개시 제도”를 잘 도입한다면 우리나라의 소송 건수도 극적으로 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로 인한 우리의 사법제도에 대한 신뢰 및 사법 서비스의 질적 향상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까지 극한 직업이 되어 버린 한국 판사의 업무량 경감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아직 분명한 대안은 보이지 않으나 문제 의식만은 모두 느끼고 있는 것 같으므로 조금씩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져 나갈 것이라 확신한다. 이렇게 한 발자국씩 나아 가는 것이 오십견으로 고통받는 우리 후배 판사의 건강을 위한 것이며 나아가 우리 사법부의 신뢰를 회복하고 사법 서비스를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길이라 생각한다.


<필자> 박인동 변호사
- 現 김·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 주일 한국기업연합회 법률고문
- (재)한일산업·기술산업협력재단 감사
- 前 일본 동경변호사회 회원 (2007-2014)
- 일본변호사연합회 국제교류위원회 간사 (2008-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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