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메이지 시대, 일본의 서양 과학기술자들

  • 강혁 기자
  • 발행 2021-11-09 11:13

“1880년 1월 1일 New York Herald 기고에서 모스는 당시 도쿄대학이 의학은 독일인이, 외국어교육은 프랑스서 와 독일 영국 중국인 교수들이 가르치고 있었으며, 4명의 영국인 1명의 프랑스인 2명의 독일인 8명내지 10명의 미국인이 있었다고 하였다.”  -우남숙


에드워드 모스와 일본의 사회진화론

에드워드 모스 Edward S. Morse (1838-1925)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까지 미국에서 활동했던 저명한 동물학자다. 메인주 포틀랜드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때부터 조개류의 수집과 분류에 큰 흥미를 느꼈고, 손재주와 그리기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는 정식으로 과학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그의 수집품 목록과 뛰어난 자연사학자로서의 재능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21살에 불과한 나이에 모스는 저명한 미국의 동물학자 루이 아가시의 조수로 취직하게 되고, 33세엔 보든 칼리지의 교수로 동물학을 가르치게 된다.


평생 조개류를 연구했지만, 모스는 다른 경력들로 역사에 더 유명하게 남았다. 먼저 그는 초기 미국에서 진화론이 전파되던 시기에 다윈의 진화론을 미국 과학교육 체계 속으로 자리잡게 만드는데 기여한 유명한 대중 진화생물학자로 기억된다. 진화생물학자이자 훗날 유명한 생물학적 인종주의자가 되는 루이 아가시의 제자로 교육받은 그는, 다윈의 진화론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사회적 다위니즘 혹은 사회진화론이라 불리게 되는 학문의 지지자가 된다.


사회진화론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서구는 물론 동아시아의 지식인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유행했던 진화론의 조류로, 하나의 이론이라기보다 다양한 학설과 사회운동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대표적인 사회진화론자는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로, 그는 다윈의 자연선택 개념을 사회에 적용해서,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사회유기체의 진화를 해석하는 이론을 만들었다. 20세기 중반 역사학자 홉스테더는 스펜서류의 진화론을 ‘사회진화론 social Darwinism’이라고 명명하고,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에 걸쳐 다윈의 이론을 정당화하거나 혹은 인간의 경쟁을 장려하는 많은 사상가의 시도”라고 정의했다.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진행되던 이 시기에, 사회진화론이 제국주의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봉사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제국주의의 침탈을 받던 동아시아의 지식인들 역시 사회진화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사회진화론을 일종의 서구에서 유래한 근대적 지식의 최전선으로 인식했다.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사회진화론을 포함하는 진화론을 맨 먼저 받아들인 국가는 바로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이었다. 그 메이지 유신기의 일본에 진화론을 처음으로 제창하고 전파한 인물이 바로 모스였다. 따라서 모스는 자신의 조국 미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한 동물학자로 남게 된다.



오모리 패총과 모스의 제자들

모스가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한건 1877년 6월로 그의 나이 39세 때였다. 그는 완족류 연구를 위해 일본을 찾았는데, 일본이 연체동물 자원을 상당히 많이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방문을 통해 도쿄 대학의 동물학 및 생리학 교수가 되었고, 매주 한 차례씩 도쿄 대학에서 진화론을 강의하며 오모리 패총 발굴조사를 병행했다. 그의 강의노트는 1883년 <동물진화론>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어 일본 학계를 강타했고, 이렇게 연결된 모스와 일본의 인연은 이후 계속되는 일본 방문으로 이어진다. 이후 모스는 일본의 풍속과 사회제도 및 문화에 대한 여러권의 책을 출판하고, 일본 정부로부터 욱일장 및 서보장 등의 훈장까지 서훈받는다. 1925년 사망하기 전까지, 모스는 일본 정부와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의 유언에 따라 그가 소유했던 모든 책은 도쿄 대학에 기증되었다. 또한 모스가 에노시마에 오두막을 빌려 완족류 연구 및 채집을 했던 장소는 일본 최초의 동물학 실험소로 현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오모리 패총은 흔히 일본 고고학의 발상지라고 불린다. 모스에 의해 발견된 이 패총에선 조개류는 물론 토기와 석기 그리고 사람 뼈 등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고, 이 중 165점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1955년에는 국가 사적이 된다. 오모리 패총 발굴은 일본 역사상 최초로 진행된 과학적 목적의 발굴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모스는 뛰어난 그림 실력으로 발굴된 조개를 직접 그려 기록으로 남겼고, 과학적 보고서가 간행될 수 있도록 도왔다. 모스는 일본에 머물면서 많은 학생을 가르쳤는데, 이들 중 사사키 주지로는 훗날 곤충학자가 되어 일본 양잠학의 발전에 공헌했고, 마쓰무라 진조는 훗날 식물학자로 명성을 날렸으며, 이지마 이사오는 일본 조류학과 기생충학의 창시자가 된다.


모스는 정규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고 과학자가 된 독특한 경력의 인물이었다. 그의 천부적인 재능 덕분에 루이 아가시의 눈에 띄어 조수가 되었지만, 과학자로서의 모스는 일반적인 강단의 학자들과는 많이 달랐다고 전해진다. 특히 독학을 했던 그는 과학교육에 관심이 많았고, 이를 위해 학문적 실천을 자신의 좁은 전공분야로 한정하지 않았다. 그는 과학자로 훈련 받은 경력을 여러 사회문제의 해결에 사용하고자 했으며, 그의 이런 성향은 당시 영국을 중심으로 전세계로 퍼져나갔던 사회진화론과 맞아떨어졌다. 모스는 동물학을 넘어 고고학, 인류학, 일본 풍속에 관한 연구 및 심지어 당시 일본에 유학중이던 한국인들을 인터뷰한 일종의 사회학적 저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학문적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특히 모스의 저술은 미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데 크게 기여했다.



메이지 시대의 고용 외국인들

메이지 유신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건 어려운 일이다. 일반적으로 메이지 유신은 막번 체제를 해체하고 왕정 복고를 통해 중엉 통일 권력의 확립에 이른 정치, 경제, 군사제도의 변혁을 총칭한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을 특징 짓는 가장 큰 변화는, 일본이 이제 국가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서구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일본의 물리학자 야마모토 요시타카는<일본 과학기술 총력전 - 근대 150년 체제의 파탄>이라는 책에서,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150여년이 넘는 기간의 일본을 “과학기술을 이용해 근대화를 달성하는 총력전 체제의 역사”로 규정한다.


특히 그는 일본이 열강과의 경쟁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서양의 과학기술을 가장 중요한 부국강병의 수단으로 받아들였고, 일본의 정치세력은 과학기술만을 ‘탐욕스럽고도 상당히 효율적으로 흡수했으며 정부 지도와 군의 견인으로 공업화와 근대화를 성취’했다고 평가했다. 물론 전공투의 상징적 존재였던 요시카타는 일본의 서양 과학기술 수용이 전적으로 부국강병의 수단이었을 뿐, 과학에 녹아 있는 자유나 합리주의 같은 근대정신이 배제되었 있었다고 비판하지만, 그건 서양 과학기술을 수단으로서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조선이나 중국에 비한다면 박한 평가일지 모른다.

메이지 시대, 일본은 서양의 모든 것을 배우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했다. 그리고 이 중 특히 과학기술분야에 집중했는데, 이를 위해 대규모 번역작업을 수행하는 것은 물론 교육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편한다. 메이지 정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서양인들을 대규모로 고용해 학생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츠다 우메코처럼 해외로 유학을 떠난 일본인 학생들도 많았지만, 메이지 정부의 주요 전략은 서양의 과학기술교육 제도를 그대로 일본에 들여오는 것이었다.


따라서 엄청난 숫자의 외국인 교사들이 일본에 쏟아져 들어오게 된다. 흔히 고용 외국인 お雇い外国人이라 불리던 이들은 대부분 유럽과 미국에서 초대되었고, 엄청난 고액의 보수로 채용되었다.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 출신의 엔지니어 헨리 다이어는 당시 수상 이토 히로부미보다 많은 월급을 받았을 정도였다. 1874년을 기준으로 일본내 외국인들이 받던 급여가 국가 예산의 30%를 넘었다고 할 정도이니, 메이지 시기 일본이 얼마나 대대적으로 서양과학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굿데이 등이 집필한 책 <기술이전과 문화교환: 서양 과학자와 엔지니어와 만난 도쿠가와 말기에서 메이지 일본시대>에 자세히 쓰여 있다.

메이지 정부가 외국인 우대정책을 통해 서양 과학기술을 단기간에 흡수하려 했던 이유는, 과학기술인력을 빠른 시간 안에 모두 일본인으로 대체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1899년경이 되면 이들 고용 외국인들은 더이상 고용되지 않았고, 남아 있던 외국인들 역시 고국으로 돌려보내기 시작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30년, 일본은 세계 역사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외국인을 동원해 단 한가지 목표에 집중했다. 그건 바로 과학기술의 국산화였다. 국가주도의 과학기술개발로 어떤 성과를 창출하려면, 적어도 메이지 시기 일본의 노력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필자> 김우재 교수
- 중국 하얼빈 공과대학교 생명과학센터 조교수
- 포항공과대학교 생명과학과 박사
- 저서 <플라이 룸>, <선택된 자연> 등
- 동아사이언스, 한겨레 등 다수 매체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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