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이 ‘(한일)청년 칼럼’을 시작하며]
한일 청년에 의한 ‘청년 칼럼’을 기획하였습니다. 기존의 전문가 시선이 아니라, 기성세대와 다른 기억, 시각을 가진 양국의 청년들이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며, 미래의 한일관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JK-Daily 를 통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 생각과 메시지의 축적이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의 방향을 제시하고, 그 방향을 함께 가면서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문제를 해결해가는 방법을 찾아갈 거라 기대합니다.
그 첫 번째 칼럼으로 지난 2024년 11월 연세대학교에서 개최된 ‘제2회 한일청년 미래회담’에서 다루어진 테마 중 ‘태평양전쟁과 히로시마’에 대한 한일 양국 청년의 생각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간 민감하다, 부담스럽다 피해왔던 테마들에 대해 청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특히 히로시마 출신 일본인 청년 마루키 코코로 님은 이 주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서로의 시각으로 바라본 「태평양전쟁과 히로시마」"
마루키 코코로 님(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24학번)
고유진 님(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23학번)
일본인이 보는 태평양전쟁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군부가 권력을 장악한 군국주의 국가였다. 국가 총동원법에 따라 국민들은 전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고 교육 제도도 크게 변화하여 사상 통제 교육이 이루어졌다. 천황 친정을 요구하는 황도파에 의해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기 때문에 교과서 내용도 국가에 대한 헌신과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구성되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훌륭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연장선에서 가미카제 특공대가 존재했고, 식민지에 대해서 황민화 교육을 통한 일본인화가 진행되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체 사망자는 310만 명이며, 그중 80만 명이 민간인이었다. 다음 3가지 사건에서 큰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오키나와 전투는 처음으로 일본 영토가 전장이 된 사건이다. 12만 명(당시 오키나와 주민의 1/4)이 사망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동굴인 ‘가마’에 피신했는데 미군의 포로가 되면 살해된다는 미신이 퍼져 있어 발견되었을 때 아무도 영어를 하지 못했던 동굴에서는 집단 자결이 일어나기도 했다. 본토 공습에서는 약 50만 명이 사망했다. 처음에는 군수 공장을 목표로 공격했으나 점차 무차별 공습으로 바뀌었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특히 도쿄 대공습에서는 1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실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히로시마는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에 리틀보이라는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약 14만 명이 사망했다. 나가사키는 8월 9일 오전 11시 2분에 팻맨이라는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약 7만 명이 사망했다. 당시 상황은 지옥 그림에 자주 비유된다. 구체적인 경험담을 소개한다.
“제가 거기서 본 것은 폭심지에 가까운 마을에서 피폭되어 교외를 향해 도망가는 사람들의 줄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폭풍이나 열선을 맞은 것일까요. 머리에 재를 뒤집어쓴 것처럼 지저분했고, 머리칼은 물구나무를 서고, 화상을 입은 팔과 몸의 피부는 헝겊처럼 늘어져 있었습니다. (중략) 먼지로 뒤덮인 남녀 구분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힘없는 발걸음으로, 목소리를 낼 힘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묵묵히 천천히 걷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지옥에 그려진 유령의 행렬 같은 광경이었습니다” (히로시마/직폭 1.7㎞/여성/5세)
또한 생존한 피폭자도 '브라 브라 병(체력·면역력이 약해지고 쉽게 지친다. 몸이 나른해지며 남들처럼 일할 수 없어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하고, 중증화되는 비율이 높다.)'이나 백혈병에 걸리기 쉬워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피폭자들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편견도 많았고,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다고 한다.
일본으로서는, 일본국 헌법 제9조의 평화 헌법을 기초로 하여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명확히 했다. 주요 내용으로는 전쟁 포기, 전력 불소지, 교전권 부정이 있다. 일본인의 인식도 국가의 입장과 크게 차이 없이, 전쟁 상황에선 비인도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절대로 다시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강하다.
평화에 관한 일본인의 태도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여전히 수동적이다. 능동적이고 건설적인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위해 어떠한 요소가 필요한지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다만, 핵무기 폐기에 관심이 많아 실제 핵무기 폐기 활동으로 2024년 일본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일본은 이와 같은 노력의 일환으로 평화교육을 실시하는데, 1970년부터 주로 공립학교에서 이루어졌다. 생명의 소중함을 전달하고 평화 도시의 일원으로서 세계의 영구 평화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함양하기 위해 진행되고 있다. 필자가 다녔던 학교에서는 원폭이 투하된 8월 6일에 학교에 가서 책이나 영화를 감상하고 피폭자나 피폭 2세의 강연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이루어졌다. 평화교육을 받으면서 절대적 평화주의가 추구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 핵무기를 폐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폭자의 강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말로 전쟁을 하면 안 됩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살인입니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임을 당하니까 전쟁은 절대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영화나 애니메이션 같은 것을 보면 멋있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살인입니다. 요새 젊은 사람에게 정말로 전하고 싶은 것은 전쟁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뿐입니다. 하물며 지금은 핵의 시대이기 때문에 한방에 불바다가 되니까요. 운 좋게도 저는 죽지 않았지만, 전쟁하면 죽을 것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어머니나 아버지로부터 받은 생명, 생명을 소중히 해 주었으면 합니다” (히로시마/직폭 1,7㎞/여성/20세)
“피폭의 체험을 듣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핵 전쟁의 부조리를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인 배경을 공부한 후에 남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자신의 머리로 조립해 나가는 것을 해야지. 이론으로 뒷받침된다는 것이 분노의 근본이 되고, 운동도 오래가지 않을까 합니다” (나가사키/입시 피폭자/남성/12세)
피폭으로부터 80 년이 흘러 전승(伝承)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지만 더 많은 사람이 전쟁의 고통을 알고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태평양전쟁과 한국인의 인식
태평양 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 말미, 일본 제국주의 팽창 정책에 대한 미국의 제재에 일본이 진주만 공습(1941)으로 보복하며 발발하였다. 태평양 전역에 걸쳐 4년 동안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전투, 이오지마 전투, 오키나와 전투 등 크고 작은 전투들이 있었고, 1945년 8월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을 맺게 된다.
태평양 전쟁은 주로 바다나 척박한 환경의 섬들에서 일어났고, 동서양의 다른 문화권의 충돌, 오래 지속된 전쟁의 피로, 각 진영의 프로파간다 등으로 인하여 매우 참혹한 전쟁이었는데, 이는 도쿄대공습 ∙ 난징대학살 ∙ 일본군위안부 ∙ 가미카제 등 반인륜적 사건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다만 한국인들에게 태평양 전쟁은 잘 와닿지 않는 역사이다. 역사 교과서에서 비교적 상세히 묘사하는 일본과는 달리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간접적인 전장으로서 한국에 미친 영향은 분명 무시할 수 없다. 연인원 780만 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한반도와 일본, 남사할린, 태평양, 동남아, 중국 관내와 만주지역으로 동원되었다. 원자폭탄 투하에서도 벗어날 수 없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군수 도시였기 때문에 원자폭탄에 피해를 입은 한국인들은 일제에 의해 강제 노역이나 잔해 제거에 동원된 경우가 대다수였다. 당시 히로시마 인구 중 14만 명(전체의 1/3)이 한국인이었고, 전체 한국인 피폭자 수는 7만여 명에 달했다. 그럼에도 일제의 식민통치로 인한 희생자로 인식하면서도 강제 징용 피해자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비해 잘 언급되지 않는다.
한국 교과서에서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결국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도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로 얼마간 유지되었던 국가들과 다르게, 한국은 일본의 포츠담 선언 수용 및 항복과 동시에 해방되었으므로 한국 사람들에게는 “일본이 원자폭탄을 맞고 항복해 한국이 해방되었다”라는 식의 인과관계가 지배적이다.
따라서 한국인들에게는 원자폭탄의 비극적 이미지보다는, ‘전쟁범죄에 대해 진정한 반성 없는 일본 정부’에 대한 비판과 일본이 받은 공습과 원폭에 대해 일종의 ‘업보’라고 여기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원자폭탄의 참상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도 당시 일본 내 상황과 이에 대해 일본인들이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원자폭탄의 사실에 집중하다 보면,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가? 하는 논쟁이 발생한다. 원자폭탄 투하는 당국 간의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맞물린 가운데 발생하였고 현재도 무수한 논쟁이 존재한다. 따라서 일본의 가해 책임을 명확히 하고 미국의 원자폭탄 사용에 대해 비판하는 절대적인 평화주의의 입장이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여기서 우리는 정치적인 시비에 앞서 원자폭탄 투하라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사건을 단편적 인과관계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죄없이 죽어간 수많은 민간인을 분명하게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전쟁과 식민지통치에 대한 일본의 반성을 요구하면서도 핵무기 사용은 인류의 보전과 평화를 위해 다시는 이루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해 인식해야 한다. 이를 위해 편협하고 다분히 정치적인 시선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원자폭탄이라는 아픈 역사에 보다 명확히 집중하고 다양한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의 미래를 위하여 (고유진, 마루키 코코로)
위 발표 후, ‘한일청년 미래회담’에 참가한 한∙일 청년들은 ‘태평양 전쟁과 히로시마’에 대해 각국에서 어떻게 배워왔는지, 일본에 대한 전쟁 책임은 누구에게까지 지워야 하는지 등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 결과 “현재 한∙일 정치체제와 문화 변천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한국인/일본인 공통의 의견) “전쟁을 일으킨 것, 전후 전쟁범죄 처리에 대한 것은 일본 정부의 책임”(한국인의 의견) “정부를 선택한 것은 일본인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책임을 피할 수 없다”(일본인의 의견) 등의 의견이 나왔다.
한일 관계는 결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외교적 과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과거사를 마주하며 서로의 입장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김상준 교수(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는 ‘기억의 정치학’이라는 논문에서 “전쟁으로부터 시간적으로 멀어지면서 전쟁을 직접 경험한 개인의 기억보다는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집단적 기억의 의미가 중요해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비극적인 역사가 왜곡된 방향으로 기억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일청년 미래회담’은 민감한 주제에 대해 실제로 양국의 청년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의견을 공유할 수 있었던 한∙일 이해의 양질의 진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필자도 관련 정보를 습득하면서 옆 나라뿐만 아니라 자국에서 본 연사나 그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앞으로도 한∙일 청년들의 지속적인 교류와 이해가 한∙일 관계에 긍정적인 발돋움으로 작용하길 바란다.
*본 칼럼의 내용은 JK-Daily 편집국의 의견과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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