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네가시마의 조총
1543년 8월 25일, 남동 중국해를 대상으로 밀무역에 종사하던 중국인 왕직의 배가 타네가시마 서남단 가도쿠라곶에 표착한다. 이 선박에는 3명의 포르투갈 사람들이 승선해 있었는데 신형 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섬의 도주 다네가시마 마사도키와 그의 아들 도키타카는 기존의 철포나 지화식 총에 비해 성능이 훨씬 뛰어난 이 조총에 큰 관심을 보였고, 지금 시세로 약 20억원의 거금을 주고 조총을 사들인다. 도키타카는 조총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그것이 나갈 때에는 전광을 만들어내는 것 같고, 그 울림은 우레와도 같아서 듣는 사람은 귀를 막지 않을 수 없다. 일소백을 놓는 것은 쏘는 자가 백조를 표적에 두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이 물건을 한번 쏘면 은산도 깨뜨리고, 철벽도 뚫을 수가 있다. 다른 나라 사람에게 복수하는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도 이것에 맞으면 즉시 그 혼을 잃어버린다. 하물며 묘상에 화를 입히는 사슴 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간에 이용한다면 이용법은 모두 헤아릴 수 없다.”
16세기 대장장이에게 조총 제작법은 21세기의 반도체와 마찬가지였다. 도키타카는 섬의 대장장이와 혼신의 힘을 다해 조총을 제작했지만 연이어 실패하고, 이듬해 도착한 포르투칼 상선의 조총 기술자를 통해 겨우 조총제작술을 익혀 무려 2년의 시간이 걸려서야 총포를 제작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조총은 전국시대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오다 노부나가는 1575년 조총부대로 타케다 가츠요리의 기마병에 대승을 거두었고, 이후 일본은 요동친다. 1592년, 조총의 위력을 믿고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는건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부산 동래성은 2시간만에, 서울은 20일만에 함락되었다. 포르투갈 상인에게 받은 조총 한 자루가 역사를 바꾼 것이다.
우금치의 캐틀링건
1894년 음력 11월 9일, 공주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같은 해 동학농민전쟁으로 전주성이 함락되고 농민군이 서울로 향하자, 무능한 조선 왕조는 청나라와 일본에 도움을 요청했고, 두 나라는 동학농민군을 제압한다는 명목 하에 조선에 진입했다. 우금치전투는 전투라기보다는 학살에 가까웠다. 전투란 두 개의 군대가 조직적으로 무장해 싸우는 것인데,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은 대부분 죽창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일본의 정예군은 독일제 쿠르프 야포, 캐틀링 기관총,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과 일본이 자체개발한 무라타 소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포와 기관총의 포성 앞에 동학농민군 1만 5000여명은 아무 저항도 못한채 쓰러졌다. 일본군의 사상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우금치의 패배는 조총보다 더 심각한 비대칭 무기의 결과였다. 임진왜란 이후 무려 300년이 지났지만, 조선왕조는 여전히 과학기술의 위력을 인지하지 못했다.
임진왜란과 동학농민전쟁을 다룬 사극과 역사서는, 조선의 패배를 무능한 왕조와 당쟁 등의 내부 정치적 원인으로 돌리곤 한다. 두 사건 모두 조총과 캐틀링건이라는, 당시로서는 첨단 과학기술이 동원된 대규모 전투였다. 일본과 조선은 근대 개화기 이후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수용을 두고 극단적으로 반대의 길을 걸었다. 일본이 근대화에서 조선보다 100년 이상 앞서갈 수 있었던 건,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이 만들어낸 차이 때문이었다. 19세기 조선과 일본의 운명은 과학기술 때문에 완벽하게 갈린 것이다.
근대 전환기의 혜강 최한기와 니시 아마네
근대를 어떻게 정의하더라도, 서양 과학기술이 동아시아에 그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와 근대와 겹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동아시아의 전통시대가 근대로 전환되는 19세기 중반에서 말까지, 조선과 일본 그리고 중국에서 활동했던 지식인들의 저술을 살피면, 동아시아 삼국이 서양 과학기술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외부 세계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 지식인들의 과학기술 수용과 실천에서 나타나는 차이야말로, 동아시아 삼국의 운명을 가른 시대정신의 표현일 것이다.
혜강 최한기는 1803년 태어나 1877년 죽었고, 니시 아마네는 1829년 태어나 1897년 죽은 조선과 일본의 대표적인 근대적 지식인이다. 혜강은 청나라에서 들어오는 서양서적을 모두 수집했던 독서광으로, 진보적이고 경험에 근거한 ‘기학’을 창안했고, 니시 아마네는 ‘과학’이라는 용어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지만 서양 학술의 번역에 매진하면서 ‘양학’이라는 학풍을 만든 인물이다. 둘 모두 동아시아의 근대적 전환기를 살았고, 전통시대의 유교에 심취했으나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서구문명의 도래에 민감하게 대응했으며, 서구의 과학사상과 학문에 누구보다 개방적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19세기 서양 과학기술의 위력에 의해 지식장은 물론 동아시아 전통사회가 흔들리고 있던 그 시기에, 최한기는 여전히 도덕적인 수양을 중시하고, 도덕적 정치를 통해 국가와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는 전통적인 유교적 세계관에 함몰되어 있었던 반면, 니시 아마네는 선비가 아닌 무사라는 출생에서 드러나듯이, 도덕과 정치를 별개의 문제로 보고 세계열강의 적자생존 경쟁 속에서 일본은 생존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한기의 ‘도덕’과 니시 아마네의 ‘생존’에 대한 강조는, 당연히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나타났다.
소부장 사태와 한국의 가속기
우금치 학살 이후 120여년이 지난 2019년, 다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반도체와 관련된 소재, 부품, 장비의 수출규제를 당하는 치욕을 겪었다. 물론 임진왜란이나 동학농민전쟁 때처럼 무방비로 당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은 다시금 과학기술강국으로 각인되었다. 매년 10월만 되면 한국은 일본의 노벨상에 대한 컴플렉스에 시달린다. 하지만 일본의 노벨상이 메이지 유신 이후 무려 150년 이상 지속된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로 마련된 축적의 시간 때문이라는 사실을, 한국의 정치지도자와 관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일본의 소부장 수출규제로 나라가 시끄러워야 할 때, 한국사회는 조국사태에 휘말려 있었다. 국민 눈치를 보던 여당과 청와대는 국회의원 출신을 임명하려던 과기정통부장관에 후순위였던 최기영 장관을 임명한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은 10년이 넘게 미루고 있던 차세대 방사광가속기 계획에 다시 시동을 걸라는 명령을 내린다. 충북 오창에 지어질 차세대 다목적방사광가속기는 그렇게 일본의 등살에 떠밀려서야 기재부의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1937년에 최초의 사이클로트론 가속기를 구축했고, 미국의 22대에 이어 11대의 방사광가속기를 보유하고 있다. 1945년 일왕의 항복 직후, 맥아더 장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가속기가 있는 리켄을 접수한 것이다. 미국은 일본이 원자폭탄으로 미국 본토를 습격할까 두려워했다. 한국은 1995년 포항에 설치된 방사광 가속기 1대가 전부다.
임진왜란에서 소부장사태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일본의 과학기술력에 언제나 압도당하고 있다. 개화파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김옥균은, “일본이 동양의 영국이 되려하니, 조선은 동양의 프랑스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영국도 프랑스도 일본도, 근대과학의 성과를 국가발전에 철저히 이용했던 국가들이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서양 과학기술의 성취를 받아들여, 이를 사회발전의 축으로 삼았던 일본의 역사는, 그 자체로 흥미롭고 또한 여전히 우리에게 여운을 남긴다. 양국의 긴장관계를 벗겨내고 과학기술을 축으로 일본을 직시할 때, 한국은 국가의 운영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일본이 서양으로부터 과학기술을 받아들인 과정을 정확히 이해할 때, 과학이 사회의 진보를 위해 사용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다. 일본의 역사를 바꾼 건, 과학기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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