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미적 문화의 배경에는 감각적 사유, 풀어 말해 감각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즉물적 경험을 사유의 재료로 선호하는 기질이 있다고 암시한 적이 있다. 심미적 생활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생활 전반에 걸쳐 감각적 사유를 중시한다.
이 점에서는 일본과 중국이 비슷하다. 중국사람들이 현실주의적이라고 평가받는 것은 추상적 사고나 가치보다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현실적 대상이나 가치를 사고의 재료로 주로 사용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감각중심적 성향을 즉물적 성향이라고 바꿔 말해도 된다. 물질은 감각적으로 그 존재를 체험할 수 있으니까. 예컨대 중국인들은 그들의 도교적 세계관을 구성하는 요소들, 음양오행이라던가 12지신과 같은 개념이나 존재를 시각적으로 혹은 더 나아가 의인화를 통해 구체화 시킨다.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든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은 조금 다르다. 도교적 성격이 강한 세계관을 갖고 있지만 중요한 구성요소나 개념들을 의사전달 수준만큼만 구체화시켜 놓을 뿐 그 이상으로 구체화시키지 않는다. 이런 점은 앞서 소개한 적이 있는데 한국 덤벙문화의 또 다른 얼굴인 ’본질주의’ 때문이다. 본질주의는 핵심적인 원리나 뜻이 중요하고 감각적 표현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는 태도다.
전자산업으로 세계를 주름잡던 일본이 IT산업에서 뒤쳐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원인의 하나도 이런 기질에서 찾을 수 있다. 예컨대 일본에서는 한국의 주민등록제도와 비슷한 시스템에 행정, 복지, 건강보험 시스템 등을 통합한 전자행정 시스템을 구축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전자행정시스템의 시작점으로 한국의 주민등록증에 해당하는 마이넘버카드라는 하드웨어를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카드에 건강보험이나 복지 정보를 처리하는 칩을 심는다거나 컴퓨터 단말기에 연결하는 방법 등 카드 개발을 우선시했다.
하드웨어를 우선시 한다는 말은 감각으로 그 실체나 성격을 체감할 수 있는 것을 우선시 한다는말과 같은 말이다. 좀 더 쉬운 비유를 한다면 전쟁에서 정보나 데이터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요인보다 크고 강력한 무기나 군인의 수와 같은 것을 더 중시한다면 이는 감각중심적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감각중심적 접근은 정보화 이전 시대에는 잘 맞았다. 소니 등의 전자제품과 도요타 등의 자동차가 세계시장을 휩쓸 수 있었던 것의 배경에는 정교함, 튼튼함, 집적도. 세련된 디자인 등 감각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성질들을 매우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성향은 이 글의 맥락에서 보면 하드웨어 중시로 그대로 이어진다. 그래서 소프트 파워를 키우기 어렵게 만든다. 예컨대 투명한 지우개, 자동 결재 기계 등이 최근 일본에서 개발된 제품들이다. 모두 사무용품에 해당하는 것들이고 나름 사무의 효율을 높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업무시스템이 계속 유지된다는 전제가 충족되어야만 효용성이 있을 것이다. 원격 화상 회의를 하고 온라인으로 서류를 작성하며 전자결제를 하는 정보화 조직에서는 모두 무용지물이다.
그런 이유로 마이넘버카드라는 하드웨어 중심적 정보화는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카드에 내장되어 있는 IC칩을 컴퓨터가 읽기 위해서는 리더기가 따로 필요하고 칩이 가질 수밖에 없는 데이터의 폐쇄성 때문에 용처가 제한된다는 등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예컨대 마이넘버카드는 내장된 칩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내 데이터를 끌어다 쓸 수 있다. 행정부 내에서 데이터 통합이 이루어져 있지 않다면 내 거래 은행이나 거주지를 벗어나면 무용지물이라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건강보험 정보가 내 카드에서 잘못 입력되어 있다거나 내 계좌에서 엉뚱한 돈이 인출되는 사고가 속출하기도 하는데 이는 각 개인의 정보가 정확하게 데이터화되고 통합되지 못해 발생한 것이다.
소프트웨어 기반, 다시 말해 일본국민의 주민 정보, 금융 정보 등이 먼저 데이터화되어 있어야 하고 행정부 내는 물론이고 행정부 간, 나아가 학교와 같은 공공기관 간의 데이터 통합이 전제되어야 한다.
일본에서 활동중인 염종순 교수의 말을 빌면 한국의 경우는 IMF 당시 금융권 구조조정으로 퇴사한 수 많은 은행원들을 활용해 전국민의 신상 정보를 전부 데이터화 했고 이를 토대로 전자정부시스템 구축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작업은 당장 그 성과를 체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자정보를 구축한다고 할 때 감각적 사유가 우세한 문화에서는 선뜻 먼저 손이 가기 힘든 과제다. 정보화사회에서 일본의 약진을 위해서는 감각중심적 성향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감각중심적 성향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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