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메이로쿠샤’와 ‘보초기러기’로서의 지식인

  • 강혁 기자
  • 발행 2022-04-11 17:36
“안노(雁奴)란 기러기가 무리지어 잘 때 자지 않고 경계하거나 또는 무리들이 먹이를 집을 때 한 마리는 반드시 고개를 쳐들고 사방의 모습을 살펴 만약에 있을 難을 경계하는 기러기를 가리킨다.” 후쿠자와 유키치


“후쿠자와가 주장하는 학자 직분이란 기본적으로 안노(雁奴)와 같은 역할이었다. 시세와 함께 변천하는 그 와중에 홀로 앞뒤를 되돌아보고 현재 사회의 모습에 주의하고 이를 통해 후일의 득실을 논하는 자였다.” 이건상, 정혜정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후쿠자와는 <탈아론>을 발표하며, 사상적 전회를 보여준다. 그는 조선과 중국이 고수하는 동아시아의 전통적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일본이 서양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독립하는 길임을 주장했고, 조선과 중국과의 우호적인 관계 또한 이어갈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탈아론을 기점으로 마치 일본의 제국주의적 확장정책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후쿠자와의 초기 사상은 동아시아에서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의 급진적인 자유민권사상 그 자체였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아래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로 시작하는<학문의 권유> 첫 문장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후쿠자와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국체론에 반대했다는건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서양문명, 특히 과학기술을 중심적 세계관으로 하는 새로운 문명을 향해 일본이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가장 심각한 장애는 바로 일본사회의 절대적 국체론이라고 말했다. 후쿠자와는 일본의 진정한 문명화를 위해서는 국체의 자리에 인민을 놓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자유민권사상의 지식인집단 메이로쿠샤

<학문의 권유> 제 2편에서 후쿠자와는 만민평등의 권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논구한다. 여기서 후쿠자와는 봉건정치의 전제 막부정치를 비판한다. “국민이 정부를 상전처럼 우러러 받들어 모시고”, “관청의 관리들은 무섭게 위세를 부릴 뿐 아니라”, “무사가 짐꾼을 협박하여 술값을 받아”내기도 했으며, “재정이 곤란해지면 여러 가지의 그럴 듯한 이유를 붙여 백성이 내는 세금을 올리거나 상인에게 돈을 바치라는 강제적인 명령을 내리기도” 했던 막부는, “오로지 빈부와 강약의 처지가 다른 것을 악용하고, 자기의 부강한 권세를 믿어 국민의 빈약한 힘을 압박하고, 그들의 권리를 침해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된 자는 언제나 권리가 평등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 정신은 인간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상호대등관계 reciprocity’ 또는 ‘평등 equal 관계’라고 한다.”


메이지 시대, 서양학문의 수용에 앞장 섰던 지식인의 상당수가 후쿠자와 유키치와 비슷한 자유민권사상을 받아들이고 주장했다. 니시 아마네는 “정치가가 자의적으로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경계하고, 인민의 권한을 지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했고, 쓰다 마미치는 1872년 출판조례로 모든 인쇄물이 문부성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오자, “국민의 문명화를 위해서는 사상, 행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불가결하다 하여 출판의 자유를 요구”했다.

메이로쿠샤(明六社)는 일본 최초의 학술단체로, 19세기 일본의 계몽사상을 대표한 지식인들의 집단이었다. 그 주축은 모리 아리노리, 니시무라 시게키, 츠다 마미치, 니시 아마네, 나카무라 마사나오, 미츠쿠리 슈헤이, 스기 코지, 미츠쿠리 린쇼, 가토 히로유키, 그리고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메이지 시기 대표적인 지식인들이었고, 이들 대부분은 신분이 낮은 하급무사나 서민 출신으로, 양학에 능한 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주미 공사로 부임했던 모리 아리노리가 일본으로 돌아와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느끼고, 유럽의 ‘학회’ 같은 지식인집단을 결성한 것이 메이로쿠샤의 시작이었고, 이들은 매월 1일과 16일에 정기모임을 열고, 연설회와 잡지발행을 두 축으로 학회활동을 이어나갔다.

18세기 프랑스 대혁명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던 계몽사상가들은, 절대왕정에 대한 비판을 수행함으로써 역사의 진보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메이로쿠샤 또한 민중의 계몽을 통해 일본의 문명화를 이루겠다는 공통적인 목표를 지닌 지식인 집단이었다. 이들이 발행했던 <메이로쿠 잡지>는 당대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김용덕은 이들의 논설이 다룬 주제들 중 비정치적인 사회계몽적 논설이 지닌 특징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이들은 서양의 자연과학에 대한 이해를 사회현실에까지 적용하려고 했다. 이는 18세기 자연과학을 기반으로 사회개혁을 추구했던 프랑스의 계몽사상을 닮아 있다. 둘째, 전통적인 가정과 여성에 대한 인습을 타파하고 국가건설의 기초를 새롭게 하려고 했다. 이 또한 이미 18세기에 여성인권을 주장했던 프랑스 계몽사상가들에 닿아 있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종교와 미신을 구분해 종교는 보호하고 이용하자는 입장을 견지했다.


학자의 본분은 무리를 지키는 보초기러기

메이로쿠샤원 대부분은 종교와 교육이라는 두 활동을 통해 국가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중 종교, 특히 서양의 기독교에 대한 메이로쿠샤 회원 간의 의견은 가끔 대립했는데, 왜냐하면 자연과학과 더불어 기독교가 서구 문명의 축이라는 인식은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의 지식인들이 공유하던 주제였기 때문이다. 특히 종교의 문제에 천착했던 니시 아마네는 <교문론>을 통해 서구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을 분석했는데, 그가 내린 결론은 서양사회의 ‘종교’가 도덕적 삶의 실천을 위한 방법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니시 아마네 등의 메이로쿠샤 회원 대다수는 도덕적 삶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인 종교의 종류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종교란 하나의 가르침일 뿐이었고, 따라서 기독교의 절대적 종교관은 메이로쿠샤 지식인들에겐 통용될 수 없었다.

메이로쿠샤를 이전의 지식인집단과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징은, 이들이 단순히 서양의 과학기술을 수용했다는 점을 넘어, 과학적 합리성을 통해 사회를 계몽하는데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동양의 전통지식 대부분을 허학으로, 서양의 과학기술을 실학으로 받아들인 메이로쿠샤원에게, 합리성은 곧 효율성이었다. 따라서 미신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는 종교는 배격되었지만, 오히려 지나치게 효율성을 따지는 이들의 극단적인 과학적 합리성은 일반 민중에 대한 우민관으로 나타나게 된다. 훗날 후쿠자와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결국은 국체론으로 흡수되고, 사회진화론의 논리 속에서 정한론을 받아들인건, 이들의 과학적 합리성 속에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었던 위계적 사고방식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모든 계몽주의의 적은, 계몽을 위계의 구조 속에서 파악하는 모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메이로쿠샤원의 연설 대부분은 정치가 아닌 사회계몽에 집중되어 있었다. 즉, 이들은 사회의 변화를 위해 정치라는 직접적 활동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전반에 필요한 지식을 생산하고 이를 통해 정치권력을 견제하고 교육을 통해 민중을 계몽하는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인물들이었던 셈이다. 메이로쿠샤를 연구했던 김용덕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국가의 목표를 설정하여 이를 추구하려 할 때, 국민을 깨우치고 이끌어가는 지도세력이 나타나며, 이들 지도세력은 서로 다른 결을 보이는 두 종류의 지식인집단으로 구분된다고 말한다. 즉, “그 목표와 자기들의 신조를 일치화시켜 목표의 추구 곧 정치적 실천에 자신을 완전히 헌신하는 그룹이 있는가 하면, 그 목표의 합리적 설정과 추구과정을 냉정하게 관리하고 때로는 견제하려는 그룹”이 바로 그것이다. 김용덕은 메이지 시기 각 번에서 활동하던 정치가들을 전자에, 메이로쿠샤를 중심으로 하는 계몽사상가들을 후자에 위치시켰다.

이런 맥락에서 후쿠자와 유치키가 <학문의 권유>에서 주장했던 ‘학자적 직분 수행’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후쿠자와는 학자가 관료가 되기보다는 재야의 입장에서 국가 독립을 위해 사업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당시 관직에 있었던 메이로쿠샤 동인들은 후쿠자와의 이런 논리를 비판했기 때문이다. 후쿠자와는 학자의 직분을 ‘안노(雁奴)’, 즉 보초기러기와 같은 역할이라고 말했다. 기러기가 무리지어 잠을 잘 때, 반드시 한 마리는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피는데, 후쿠자와에게 학자란 바로 이 보초기러기처럼 시대의 변화를 앞뒤로 지켜보며 현재 사회의 모습에 주의해 후일의 득실을 논의하는 직업이었다. 특히 후쿠자와가 관직에 들어간 학자들을 비판했던 이유는, 전제적인 정부로부터 무기력해진 인민에게 목표를 제시해주어야 할 양학자들이 모조리 정부로 들어가버린 현실에 대한 개탄이 녹아 있었다. 그는 일본에는 정부만 있을 뿐, 국민이 없다고 비판하며 민중을 계몽하기 위한 민간사업에 주력할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제국 헌법을 기초한 가토 히로유키는 후쿠자와의 주장이 지나친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이며, 이는 필히 국권의 축소로 이어질 수 있다고 비판한다. 초대 문부대신이 되었던 모리 아리노리 역시 인민과 정부, 재관과 사립이 상호대립적이지 않다고 반박하며, 후쿠자와의 논리에 따르면 정부에는 학자가 아닌 이들만 남게 될 것을 우려했다. 니시 아마네만이 후쿠자와의 정부견제론에 동의했지만, 그는 다른 회원들의 의견도 존중하며 관민조화론적 입장을 견지한다.


정치에 줄서는 한국 학자들의 모습

한국사회의 역사에도 메이로쿠샤와 같은 지식인집단이 존재했다. 예를 들어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개화당의 지식인들은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서양학문을 접하며, 조선의 개혁을 논의했던 지식인집단이었다. 하지만 시대는 이들에게 메이로쿠샤와 같은 학술적 논의를 허용하지 않았고, 명문가의 자제들로 이루어졌던 이들은 학문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나이에 너무 이르게 정치혁명을 통한 사회변혁을 꿈꾸다, 민중과 동떨어진 정변으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해방이 되었을 때, 식민지의 지식인들은 ‘조선학술원’을 만들어 학문을 통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주역이 되고자 했었다. 하지만 ‘조선학술원’의 주창자였던 화학자 안동혁과 그의 과학기술자 동료들은, 조선학술원을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백남운 등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주변부로 밀려났고, 정치화된 학술운동으로 낙인찍힌 조선학술원 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된다.

교수라는 직함을 가진 이들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와 각종 공직을 가득 채우고, 또 퇴직한 관료들은 그 권위를 들고 교수가 되는 한국사회에서, 학자의 직분이야말로 보초기러기와 같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후쿠자와 유키치의 비유는 무겁게 들린다. <학문의 권유> 4편에서 후쿠자와는 학자가 정부가 아닌 민간에서 실천을 하는 것이 더 낫다는 그의 의견에 반대하는 이들의 논리 모두에 하나씩 답하고는, 이렇게 글을 마무리한다.


“하등의 쓸모도 없는 주제에 우연한 행운으로 관리가 되고 그저 높은 봉급을 탐내어 사치에 비용을 충당하고 입으로만 천하국가를 논하는 무리들은 원래 우리들의 친구로 삼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보초기러기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한국의 학자는 얼마나 되는지,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때다.


<필자> 김우재 교수
- 중국 하얼빈 공과대학교 생명과학센터 조교수
- 포항공과대학교 생명과학과 박사
- 저서 <플라이 룸>, <선택된 자연> 등
- 동아사이언스, 한겨레 등 다수 매체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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