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한국의 볼테르와 일본 최초 페미니스트의 과학

  • 강혁 기자
  • 발행 2021-12-06 11:21

“대개 인생만사가 경쟁에 의존하니 크게는 천하국가의 일로부터 작게는 일신일가의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경쟁으로 인하여 진보할 수 있다. 만일 인생이 경쟁하는 바가 없으면 무엇으로 지덕과 행복의 숭신함을 얻으며 국가가 경쟁하는 바가 없으면 무엇으로 그 광위와 부강을 증진하겠느냐”

-유길준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연구해온 장인성 교수는 그를 ‘한국의 볼테르적 인물’로 비유했다. 왜냐하면 그는 최초의 미국 유학생으로, 서양에서 유행하던 학문을 조선의 현실에 적용하려고 노력했던 근대적 지식인인 동시에, 이를 통해 조선을 개혁하려던 실천적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볼테르는 젊은 시절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뉴턴의 고전역학이 보여주는 근대과학의 성취와 존 로크의 경험주의 철학을 배워와, 이를 프랑스의 절대왕정을 무너뜨리는데 사용하려 했던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볼테르가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에밀리 샤틀레와 함께 번역해서 프랑스에서 데카르트 학파의 쇠락을 가져온 건 유명한 일이다. 또한 익명으로 쓴 문학작품과 이를 통해 절대왕정을 타파하려던 그의 급진성이 훗날 프랑스대혁명에서 인정받아, 그는 루소와 함께 팡테옹에 안장되었다. 문제는 과연 유길준이 볼테르처럼 시대정신을 구현한 인물이었느냐는 점이다.

장인성은 유길준의 연구서 부제를 ‘한국 보수주의의 기원에 관한 성찰’로 달았다. 유길준의 사상이 1880년대 청의 양무운동 혹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조선의 개혁을 추구했던 위정척사파의 수구적 개혁과 개화파의 혁명적 개혁 그 중간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한국인 최초로 미국유학을 경험했던 청년은, 조선을 군주제에 기초한 문명사회로 개혁하려했고, 이를 위해 <서유견문>을 썼다. 장인성은 보수와 진보의 양진영이 극도로 대립하는 현재의 정치체제 속에서, 유길준은 이념으로서의 보수주의의 원형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과학사가 정인경은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통해 ‘근대과학이 뿌린 민주주의의 씨앗’을 본다. <서유견문>은 서양을 유람하고 쓴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서양의 과학기술문명을 조선에 자세히 알리는 동시에, 이를 통해 조선의 정치개혁을 도모한 저술이었다는 뜻이다. 그는 이를 위해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했고, 단순히 서양을 알리는 것을 넘어 주체적인 조선인의 관점에서 서양문명을 소개하려 노력했다. 예를 들어 <서유견문>의 첫 문장은 “지구는 우리 인간들이 사는 세계인데, 역시 행성의 하나다”로 시작해서, 태양계와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소개하는데, 유길준은 물리학이 밝혀낸 이런 진리로부터 “지구의 어느 나라도 중심이 될 수 없으며, 중국도 예외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펼친다는 것이다. 정인경은 “서유견문>은 서양의 근대 과학을 토대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정치사상을 펼쳐 보이고 있다”라고 말한다.

개화사상가로서 유길준은 서양과학기술의 자장에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그는 일본에 머물던 당시, 일본에 사회진화론을 전파했던 에드워드 모스 교수와 긴밀히 교류했고, 미국에서 유학할 당시에도 모스의 도움을 받았다. 에드워드 모스는 일본에 머물던 유길준을 인터뷰해서 라는 책을 출판하는데, 이 책은 당시 조선의 문화와 관습이 일과 산업을 방해하고 부적자생존(the survival of the unfittest) 을 격려하는 상태이며, 타락한 생활습관, 관료들의 탐욕과 압제 등은 모두 비자연선택(unnatural selection)의 결과라는 내용을 가득차 있다. 에드워드 모스는 이 책의 결론부에서, 조선이 이런 상태를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유교문명과 중국의 정치적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모스가 유길준에게 지속적으로 해준 충고와 같다.

미국의 사회진화론자였던 모스가 한국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인본주의적인 철학 때문이 아니라, 일본이 한국에 비해 비교우위에 있는 동양의 국가인 이유를, 그의 사회진화론으로 분석하기 위해서였다. 유길준은 사회진화론자 모스의 ‘충실한 제자’이자 ‘충성을 맹세’한 제자였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유길준은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인다. 볼테르가 프랑스 절대왕정에 맞설 수 있게 해준 이론적 배경이 뉴턴의 고전역학이었다면, 유길준이 조선의 개혁을 위해 꺼내든 칼은 사회진화론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유길준과 김옥균, 개혁과 혁명의 사이에서

“지나친 자는 아무런 분별도 없이 외국의 것이라면 모두 다 좋다고 생각하고 자기 나라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외국 모습을 칭찬하는 나머지 자기 나라를 업신여기는 폐단까지도 있다. 이들을 개화당이라고 하지만 이들이 어찌 개화당이랴. 사실은 개화의 죄인이다. 한편 모자라는 자는 완고한 성품으로 사물을 분별치 못하여, 외국 사람이면 모두 오랑캐라 하고 외국 물건이면 모두 쓸데없는 물건이라 하며, 외국 문자는 천주학이라고 하여 가까이하지도 않는다. 자기 자신만이 천하제일이라고 여기며, 심지어는 피해 사는 자까지도 있다. 이들을 수구당이라고 하지만 이들이 어찌 수구당이랴. 사실은 개화의 원수이다. 개화하는 데는 지나친 자의 폐해가 모자라는 자보다 더 심하다.” 유길준, 서유견문 제 14장 <개화의 등급> 중에서


유길준은 미국에서 갑신정변의 소식을 들었다. 그가 얼굴빛을 잃을 정도로 놀랐던 이유는, 저변의 주역인 김옥균, 박영효 등이 자신과 함께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공부하며 개혁을 꿈꾸었던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길준은 갑신정변에서 개화당의 반대편에 섰던 민영익을 정치적 후원자로 삼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미국에서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영국, 이집트, 싱가폴, 홍콩, 일본을 경유해서 제물포에 도착한다. 귀국길에 일본에서 그는 김옥균을 만났고, 김옥균은 유길준의 귀국을 말렸다고 한다. 하지만 유길준은 귀국을 결심한다.

갑신정변의 주역들과 오래 교류했던 그는, 귀국 이후 포도청에 감금되었지만 곧 민영익의 별장으로 옮겨져 집필에 전념하게 된다. 바로 이 시기에 <서유견문>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 책의 제14편 <개화의 등급>에서 그는 김옥균과 개화당의 갑신정변을 저격한다. 개화당은 개화의 죄인이고, 수구당은 개화의 원수라는 말 속에는, 서구의 과학기술문명을 통해 조선을 개혁해야 한다는 대의에 동의하면서도, 민영익과 고종이라는 조선의 전통적인 체제 속에서 점진적 개혁을 추구하려는 그의 철학이 녹아 있다. 그는 당시 개화당의 일부 세력이 외국 담배를 물고, 외국 시계를 차고, 외국 풍속에 대해 떠드는 세태를 “개화의 병신”이라는 표현으로 경멸한다.

유길준은 분명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적 개화사상에 동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윤식, 어윤중의 시무개화파 사상과 비슷했다. 하지만 외국 담배를 피우는 개화의 병신들을 경멸하던 그가, 1894년 갑오개혁의 숨은 실세로 가장 먼저 했던 일이 단발령이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그는 직접 가위를 들고 왕세자의 머리를 깎았다. 이 단발령으로 위정척사사상을 지닌 을미의병이 일어나고, 고종은 아관파천을 통해 러시아공사관으로 도주한다. 유길준이 꿈꾸던 조선개혁을 이루기에, 조선은 너무나 나약하고 망가진 나라였다. 그는 일본으로 망명을 떠났고, 그가 미국에서 귀국길에 만났던 김옥균과 같은 신세가 된다. 고종이 죽고 나서야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그의 정치적 야망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유길준은 1910년 한일병탄을 목격하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1914년 대부분 친일파로 변절한 가족들 사이에서 숨을 거뒀다.

유길준은 하룻강아지 같은 개화당의 어린 청년들을 경멸했지만, 김옥균에 대해서는 각별한 존경과 애정을 갖고 있었다. 비록 조선의 개혁에 대한 속도와 규모에서 둘의 현실인식과 이상은 갈렸지만,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함께 개화사상을 공부하고 토론했던 그 둘의 동지애는 각별한 것이었다. 그는 갑오개혁 당시 김옥균의 부인을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아관파천으로 망명할 때도 김옥균의 유배지에 들르기도 했다. 김옥균의 양자가 도쿄에 묘비를 세울 때 그 비문을 쓴 사람도 유길준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한말 이 두 근대적 지식인이 공통적으로 영향을 받았고, 긴밀히 교류했던 인물이 바로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면서, 현재 일본 1만엔화의 인물로 그려져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이다.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양하다. 그는 심지어 여성 인권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일본 최초의 페미니스트로도 불린다. 하지만 후쿠자와 유키치가 일본에 끼친 가장 큰 영향력은, 과학기술에 대한 그의 철학에서 기원한다. 그는 일본 과학기술자들로부터 현대 일본이 지금과 같은 과학기술강국이 된 원인으로 꼽힌다. 하지만 누구도 유길준과 김옥균으로부터 과학기술입국의 씨앗을 찾지 않는다. 일본과 한국의 근대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다른 길에 들어섰던 셈이며, 그 중심엔 서양의 과학기술을 대하는 두 국가 지식인들의 차이가 놓여 있었다.


<필자> 김우재 교수
- 중국 하얼빈 공과대학교 생명과학센터 조교수
- 포항공과대학교 생명과학과 박사
- 저서 <플라이 룸>, <선택된 자연> 등
- 동아사이언스, 한겨레 등 다수 매체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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