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축구시즌이 시작됐다. 유럽 빅리그에서 뛰는 한일 양국 선수들에 대한 팬들의 응원도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마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한국선수들의 활약이 더 눈부실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FIFA 랭킹이 더 높더라도 특출한 활약을 보이는 면면들은 한국이 월등하게 많다. 예컨대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지난 시즌 득점왕 손흥민에 더해 리그앙의 황의조, 라리가의 이강인 선수, 올해 세리에 A로 터를 옮긴 김민재 선수의 초반 기세가 심상치 않다.
반면 야구의 본산 미국 메이저 리그를 보면 올해도 오타니 등 일본 선수들의 활약이 우리 선수들을 압도할 것이다. 박찬호 선수가 활약하던 20년 전에도 일본의 노모 히데오 선수와 비교하면 아쉬움이 있었다. 축구나 야구 전문가도 아니면서 이런 예측을 하는 것은 두 종목에서 각기 요구하는 감성적 기질을 한국과 일본이 나눠 가졌기 때문이다.
야구는 축구에 비해 정적이다. 승패에 절대적인 투수의 투구는 잘 던지다가도 사소한 심리적 변수에 의해 갑자기 난조에 빠질 정도로 민감하다. 타격 역시 마찬가지다. 가만히 서서 변화구의 종류와 궤적을 읽고 자신의 무게중심을 이동시키며 배트를 휘두르는 과정은 매우 섬세함이 필요하다. 야구를 ‘멘탈 스포츠’라고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미국의 덩치 큰 선수들은 섬세함보다는 강한 힘으로 우격다짐 하지만 일본 선수들은 매우 정교한 선구안과 섬세한 동작으로 큰 힘 쓰지 않고 단타를 만들어 낸다. 이치로는 그런 타격으로 야구의 본고장을 뒤집어 놓았다.
한일 친선 고교 야구시합이 끝나면 일본 선수들은 한결같이 한국선수들의 힘에 놀란다. 이 때 말하는 힘은 타구 속도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투수의 구속은 예나 지금이나 일본선수들이 더 빠르다. 일본 프로야구 정상급 투수들은 시속 160km 대를 던진다. 이라부, 오타니, 다르빗슈, 사사키 오키 등 160km 이상을 던지는 선수가 즐비하다. 우리에게는 그런 선수가 거의 없다. 야수들의 송구속도나 타구에서 보는 힘은 분명 우리가 위인데 왜 투구속도는 그렇지 못할까? 일본 투수의 구속은 힘보다 하체를 이용한 섬세한 중심이동 등 정교한 폼과 제구력에서 나온다. 이 폼과 제구력을 높이는 데에는 끊임없는 자세관찰과 교정훈련이 효과적이다. 내성적이며 심화형 솔루션 찾기에 적합한 일본인들에게 딱 맞는 운동이 야구다.
축구는 다르다. 필드 위에서 선수들 간에 끊임없는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져야 하고 유기적 팀플레이를 해야 한다. 물론 야구에서도 선수들 간의 협업 플레이가 있고 타자에 따른 수비위치 이동 등 선수들 간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지만 축구에 비할 바 못 된다. 양 팀의 선수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선수마다 변화된 상황을 해석하고 즉각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요약하면 축구는 야구에 비해 더 사회성, 다른 말로 외향성이 필요하고 동적이며 즉각적이다. 즉각적이라는 말은 상황에 능동적이고 창의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대목에서 과거 우리 선수들은 세계적인 수준에 많이 못미쳤다. 예컨대 슛찬스에서 머뭇거리고 다른 선수에게 양보하는 플레이를 했던 것은 능동성이 부족했던 것이고 상대팀의 전략에 따라 위치나 동선에 변화를 주지 못했던 것은 창의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원인은 겸양과 양보를 미덕으로 여기고 선후배를 따지는 우리 문화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한일 월드컵이 이런 한국 축구 문화에 변화를 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일종의 트리거 역할을 했을 뿐이다. 심층문화에서는 우리의 본래 성정인 외향적이고 동적인 유목민적 특성이 가족구조의 변화와 더불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한국인의 감성적 특징은 어떤 것이고 일본인은 어떤가?
병전기질病前氣質로 비유를 하면 한국은 조울증권형이고 일본은 우울증권형이라고 할 수 있다. 강조하지만 이는 이런 병에 걸린 환자라는 뜻이 아니다. 이런 병으로 쉽게 이어질 수 있는 기질을 갖고 있다는 뜻이고 누구나 이렇게 취약한 부분은 갖고 있게 마련이다. 한국인을 조울증권이라고 진단하는 까닭은 외향적이고 동적이며 신경이 굵은, 다른 말로 스트레스를 적게 받는 유목민적 특성과 더불어 내향적이며 원칙에서 벋어나지 않으려는 강박적 성향을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예부터 가무를 즐기는 민족으로 유명했던 한국인은 관광버스, 체육관, 공원, 거리, 콘서트장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가무를 즐긴다. 심지어 결혼식장에서까지 체면 따지지 않고 신랑, 신부 부모가 막춤을 추는 경우도 본다. 싸이의 ‘강남 스타일’과 같은 음악이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다. 이런 신나는 감성을 ‘흥’이라고 하는데 그 뿌리가 샤머니즘이 강한 북방 유목민족의 굿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직 단정하기는 이르다. 이런 흥의 기질 때문에 ‘아시아의 라틴’이라는 평가가 있고 외향적인 서구인들과 쉽게 감성적 접점을 찾는다.
이런 모습과 대조적인 상황이 강의실에서 벌어진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은 매우 수동적이고 내성적이다. 질문도 거의 하지 않는다. 상담을 해보면 대개 수줍어서 혹은 질문을 했다가 망신을 당할까봐 걱정되어서라고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강의실만 벗어나면 그렇게 쾌활하고 외향적인 학생들인데... 강의실의 사례와 조금 결이 다르지만 성경을 자구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기독교 근본주의나 반공이데올로기라는 원칙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강박적 문화 역시 크게 보면 모두 내향성에서 나오는 문화다. 이런 두 개의 극단적인 기질이 교차할 때 우리는 조울증권형이라고 부른다. 정상 범위를 벗어나 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면 양극성 장애라는 질병이 되지만 그런 경우는 극소수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자살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것도 부분적으로는 이런 기질 탓일 게다.
일본에는 외향적이고 동적인 ‘조’의 기질이 약하다. 외국의 유명 팝가수들의 방일 공연을 보면 일본 관중들은 조용하다. 열광하는 한국 관중들과 달라 마치 음악에 반응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내향성의 폭과 깊이는 우리보다 훨씬 깊고 넓다. 조용하고 검박하며 타인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기 자신 속에 침잠하려는 기질이 일본인들에게는 체화되어 있다. 유명작가 이쓰기 히로유키五木寬之와 정신과의사 가야마 리카香山りか가 쓴 <우울의 힘>이라는 책에서는 일본을 우울의 사회라고 진단한다. 그러나 이 우울의 시대는 에너지를 축적하는 시기이기도 해서 우울이 바닥을 칠 때 일본 사회는 반등을 시작한다는 희망 섞인 전망을 내놓는다. 일본은 자타가 인정하는 우울증권형 문화를 갖고 있다. 때때로 발현되기도 하는 일본의 외향성은 외피일 뿐 그 속에는 내형성이 도사리고 있다. 깊은 내향성이 주는 무기력, 답답함을 극복하기 위한 일본식 모색이 외향성으로 보일 뿐이다.
운동장 한 켠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관찰하며 투구폼과 타격폼을 교정하고 반복하는 야구라는 운동의 훈련과정은 자기관찰에 능한 내향성 기질과 잘 들어 맞는다. 자신의 통제 밖에 있는 타인을 신경 쓰지 않고도 얼마든지 단독으로 기량을 갈고 닦을 수 있고 다음 공격이나 투구를 나름대로 계획할 수 있으니 자신이 통제력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점도 야구가 우울증권형인 일본인과 잘 맞는 대목이다(Internal Locus of Control 개념 참조).
동료와 끊임없이 커뮤니케이션하며 즉흥적으로 대응하고 공을 갖고 있는 순간마다 플레이를 리드하는 작은 지휘관이 되어야 하는 축구는 한극인의 조의 기질과 들어맞는다. 빅리그에서 양국 선수들의 성과는 이 두 기질의 대비 속에서 보면 더 흥미로워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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