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일본의 첫 노벨과학상을 국내파가 수상할 수 있었던 이유

  • 강혁 기자
  • 발행 2021-09-23 11:53


“당시 미국에 유학하고 있던 일본의 학생은 모두 훌륭한 무사기질에 부유 한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인격고양에 매진하며 학문에 정진하는 장래가 유망 한 인물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마음으로부터 경의를 표했다. ... (중략) ... 그들은 항상 대일본국을 열국 중에 가장 큰 나라로 만든다고 하는 마음을 가 지고 …”


-미국 선교사 그리피스가 19세기 말 일본 유학생에 대해 쓴 글 중에서



쇄국과 유학, 일본의 근대를 이끈 딜레마

일본은 지금까지 24개의 노벨과학상을 수상했고, 이 중 11개가 물리학에서 나왔다. 김동원이 쓴 논문 <일본 이론물리학자 그룹의 등장>에는 실험물리학이 대세였던 20세기 초 일본의 학계에서, 어떻게 이론물리학자 그룹이 등장해 향후 수많은 노벨물리학상의 기원이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가 잘 분석되어 있다. 국가의 발전을 위해 실험물리학이 장려되었지만, 물리학계가 양적으로 팽창해 근대화나 산업화에 필요한 인력이 어느 정도 충당할 수 있게 되자, 이론만을 추구하는 물리학자들의 활동도 허용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당시 과학계에는 아인슈타인이라는 스타가 탄생해 있었다.

마침 일본을 방문했던 아인슈타인에 일본사회는 엄청나게 열광했고, 이런 사회적 배경 속에서 이론물리학으로 유학을 하고 돌아왔던 도모나가 신이치로, 국내파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 등의 소수 이론물리학자들은 세계를 선도하는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다. 특히 일본 학계의 특징, 즉 한 연구원이 일단 연구팀에 합류하면 대부분 일생 동안 그 집단에 남아 연구한다는 문화로 인해, 일본의 이론물리학계는 독특한 학풍을 지닌 네트워크를 유지하며 20세기 초반 이론물리학의 전성기 동안, 물리학사에 지대한 공헌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 물리학계의 첫 세대인 야마가와 겐지로, 다나카다테 아이키추, 나가오카 등은 모두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던 유학자였다. 그들은 물리학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당시 영국과 독일 등에서 폰 헬름홀츠, 막스 플랑크 등의 전설적인 물리학자들의 세미나를 들으며 성장했고, 이후 조국 근대화를 위해 귀국해 죽기 전까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했던 인물들이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일본인의 해외 유학은, 근대 일본의 형성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메이지 유신 직전부터 일본엔 유학붐이 일었다. 당시 막부는 뛰어난 청년들을 네덜란드에 관비로 유학보냈고, 이들 중엔 유신 이후 문무, 외무, 농상무 대신을 역임한 에노모토 다케아키 같은 인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각 번에서도 별도로 유학을 보냈는데, 이들은 막부 몰래 영국과 프랑스로 유능한 학생들을 파견했고, 이들 중 조슈번의 도움으로 유학을 갔던 5명의 학생 중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유학비는 저택 2채 가격 정도에 이를 정도로 비쌌지만, 막부와 각 번주들은 서양기술 도입을 위해 해외유학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 초기 유학생들이 이후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고위관료로 성장한다.



무사의 과학

막부 말에서 유신 초기 일본의 해외유학생 현황을 연구한 김보림은 일본이 미국에 의해 개국한 이래, 다양한 방법으로 구미제국과의 관계를 발전시켰지만, 특히 “도쿠가와 시대 말기로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과학과 문화의 방면에서 서양세계와 접촉한 것이 일본의 근대 발전에 강한 영향력을 끼친 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막부 초기 해외유학생의 대부분은 젊은 무사였다. 특히 이들은 서구열강의 위압 속에서 일본을 구해야 한다는 일종의 맹세를 한 애국자들이었다.

막부 말기가 쇄국의 시기라, 해외유학이 제한적으로 이루어진 것에 비해, 메이지 시기가 되면 신정부에 의해 적극적으로 해외유학생이 파견된다. 1868~1872년 사이 유학생의 증가가 시작된 이후, 1882년 관비해외유학생 규칙이 제정되면서 일본의 청년들은 정부와 관의 도움으로 해외유학길에 오른다. 당시 통계를 보면 1868~1874년까지 일본이 가장 많은 유학생을 보낸 국가는 미국으로 총 209명에 이른다. 그 외에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벨기에, 홍콩,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위스 등이 뒤따르는데 불과 6년의 기간 동안 무려 550명이 해외유학을 떠났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메이지 초기 유학생의 대부분이 자연과학계열의 과정에 입학했다는 점이다. 이들 중에서 일본 과학의 제1세대가 등장한다. 아래는 각 국으로 떠났던 일본 유학생들이 선택했던 전공들이다.


영국 : 기계학, 상업, 금속공학, 조선공학, 가축학, 자선사업
프랑스 : 법학, 국제법, 동물학, 식물학
독일 : 정치학, 의학
미국 : 우편, 공예, 농업, 가축학, 상업, 광업


미국에 의해 개항했던 일본은 이후 과학기술의 발전에서도 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특히 1870년대, 미국 대학에 입학한 일본인 유학생의 절반 이상이 생리학과 공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당시 일본의 근대화가 가장 늦었던 학문 분야를 이들이 선택했기 때문이다. 1880년이 되면 주요 전공은 인간과학 및 사회과학, 사법, 공법, 자연과학 및 공학의 순서로 바뀌게 되고, 1890년대에는 일본에서 학부를 마치고 독일로 과학기술을 교육받으러 떠나는 유학생이 늘어나게 된다. 당시 세계 과학기술의 최강국은 독일이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 분야로 유학을 떠난 학생들 모두가 무사는 아니었고, 그들 모두가 귀국 후 일본 정부에 우호적이었던 것도 아니다. 유학생 중 일부는 막부와 정부를 넘어선 큰 세계를 경험하고 일본 사회의 비판자가 되기도 했다. 무사 출신으로 권력의 핵심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과학기술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던 이들은 정부 주도의 물질적 근대화 뿐 아니라, 이런 비판자의 역할을 통해 일본 사회의 내부적 다양성에 기여했다.


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유카와 히데키는 1949년 중간자의 존재를 예측한 공로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다. 놀라운 사실은 히데키는 유학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일본 교토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강사로 활동한 국내파였다. 해외유학조차 가지 않았던 히데키가 1935년의 발견으로 1949년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막부말부터 메이지 시기까지 일본 정부가 해외유학생을 통해 서구의 과학기술을 흡수하고 이를 일본에 체계적으로 이식하려했던 노력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의 노벨과학상은 축적의 시간으로 인해 가능했던 셈이다.


<필자> 김우재 교수
- 중국 하얼빈 공과대학교 생명과학센터 조교수
- 포항공과대학교 생명과학과 박사
- 저서 <플라이 룸>, <선택된 자연> 등
- 동아사이언스, 한겨레 등 다수 매체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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